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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레드카펫보다 아찔한 자연의 붉은 융단…애틋함 담긴 이 꽃 한창인 고창 [전승훈의 아트로드]

입력 2022-09-24 14:00업데이트 2022-09-2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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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고즈넉한 산사로 가는 길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것일까. 나무 그늘 아래 활짝 피어난 꽃무릇의 유혹이 온몸을 휘감는다. 가을은 모든 것이 스러져 가고, 퇴색하는 계절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계절에 선명한 붉은 융단이 깔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노을빛처럼 불타오르는 숲속의 꽃밭은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보다 아찔한 황홀경을 연출한다.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꽃무릇이 한창인 고창 선운사와 영광 불갑사에 다녀왔다.


●선운사 도솔천에 핀 그리움의 꽃




전북 고창의 선운사는 해마다 3, 4월이면 온 산에 빨간 동백꽃이 피어난다. 붉은 동백꽃이 통째로 툭툭 떨어지는 모습은 처연한 사랑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선운사(禪雲寺) 동백나무 숲은 절 뒤쪽 산자락에 30m 너비로 3000여 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불에 잘 타지 않는 동백나무는 산에 불이 났을 때 사찰을 보호하기 위한 방화림(防火林)으로 많이 심어 왔다.



그런데 가을의 초입에 선운사는 어떤 단풍보다 먼저 붉은 유혹으로 물든다. 동백꽃보다 더 슬픈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석산(꽃무릇)이다. 선운사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꽃무릇 행렬은 길가에서 몇 송이씩 무리지어 하늘거린다. 마치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서 붉은색 개양귀비꽃이 초록색 들판과 흰 구름 속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꽃무릇은 햇살 아래에서는 오히려 색이 바래 흐려진다. 반면 나무 그늘에서 무더기로 피어난 꽃무릇은 더욱 진한 크림슨색으로 빛난다.



꽃무릇은 ‘상사화(相思花)’의 일종이다. 땅에서 맵시 있게 솟아오른 초록색 꽃대 위에 덩그러니 한 송이가 달려 있다. 매끈한 줄기에는 어떤 잎의 흔적도 없다. 광합성은 어떻게 하고, 영양분은 어떻게 얻을까. 답은 뿌리에 있었다. 수선화과인 꽃무릇은 알뿌리로 번식을 한다. 꽃이 지고 나면, 10월에 파릇파릇한 잎이 돋아난다. 겨울에 선운사에 오면 살찐 부추나 난초처럼 생긴 풀들이 온통 새파랗게 나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돌 틈에서 나오는 마늘이라고 해서 ‘돌마늘(석산)’ 또는 ‘개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 상사화의 잎과 꽃은 어긋난 시간 때문에 같은 하늘 아래서 만날 수 없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듯이 인연이란 스치지 않으면 맺어질 수 없고, 만남 없이 생겨나지 않는 게 그리움이다. 그러나 꽃과 잎이 홀로 버텨낸 시간은 헛된 것은 아니다. 잎은 부지런히 광합성을 해서 뿌리에 영양분을 비축하고, 그 힘으로 허공으로 불쑥 기다란 꽃대를 올려 꽃을 피워낸 것이다. 꽃은 열매도 없이 땅으로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



“아직 한번도/당신을/직접 뵙진 못했군요//기다림이 얼마나/가슴 아픈 일인가를/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잘 모릅니다.//좋아하면서도/만나지 못하고/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어긋나 보지 않은 이들은/잘 모릅니다.//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오랜 세월/침묵 속에서/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어둠 속에서/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익혀왔습니다.//죽어서라도 꼭/당신을 만나야지요/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오늘은 어제보다/더욱 믿으니까요.”(이해인 수녀 ‘상사화’)



꽃무릇이 유난히 절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는 이유는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뿌리 성분을 짓찧어 넣으면 좀이 슬지 않고 색이 오래 유지된다고 한다. 그래서 절마다 상사화에 얽힌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선운사 꽃무릇을 더 호젓하게 즐기려면 대웅전을 지나 물소리를 들으며 도솔암까지(약 2km) 산책하면 좋다. 선운사 옆으로 흐르는 도솔천 계곡의 어두운 물빛을 환하게 밝히며 피어 있는 꽃무릇은 더욱 애틋하다. 도솔천 물빛에 반사된 나무 그림자는 그야말로 피안의 세계다. 꽃과 빛, 그늘과의 명암 대비가 시선을 확실히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다.
●영광 불갑사 꽃무릇


우리나라 3대 꽃무릇 군락지는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다. 그중에서 영광 불갑사는 국내 최대 군락지다. 단일 군락으로는 불갑사 일대가 가장 많다. 선운사의 꽃무릇은 길 따라 자연스럽게 피어 있고, 불갑사 꽃무릇은 노을빛 꽃 융단을 펼친 듯 압도적이다. 불갑사는 선운사보다 2, 3일 개화기가 빠르다.



영광 법성포는 백제 불교가 최초로 도래한 지역이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영광 법성포를 통해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다. 그가 건립한 최초의 사찰이 불갑사다. 불갑사(佛甲寺)는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사찰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영광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法聲浦)는 성인(聖人)이 법(法)을 가지고 들어온 포구란 뜻이다.

불갑사에서 언제부터 상사화를 심어 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사찰 뒤편 동백골 주변에 자생하던 것이 골짜기로 번져 연실봉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상사화로 뒤덮였다. 일주문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약 1km 구간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좌우 산자락과 공원이 온통 붉은 꽃물결이다. 불갑사 경내에 들어가면 흙담 아래에 삼삼오오 피어 있는 꽃무릇이 정겹다.



불갑사에는 상사화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불갑사에서 수행하던 ‘경운’이라는 스님이 불갑사를 창건한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인 간다라 지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님은 법회에서 만난 간다라 지역 쿠샨 왕의 공주와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스님을 추방하게 되고, 공주는 작은 화분에 참식나무 한 그루와 작은 씨앗을 선물로 주었다. 불갑사로 돌아온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참식나무 밑에서 꽃이 피어나는데,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상사화라 하였다고 한다.



상사화는 석산(꽃무릇) 외에도 붉노랑상사화, 제주상사화, 위도상사화, 백양꽃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여름철 8월이 상사화의 절정기이고,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은 꽃무릇 세상이다. 꽃무릇이 꽃이 핀 뒤에 10월쯤에 잎이 나는 반면, 다른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난 뒤에 여름에 꽃이 피는 점이 다르다. 꽃과 잎이 서로 볼 수 없는 특성은 같다. 꽃무릇은 김천 직지사, 정읍 내장사, 서울 길상사 등에서도 10월 초까지 감상할 수 있다.
●한국의 아이비 송악과 수동리 팽나무


고창 선운사로 가는 입구 매표소 옆엔 개울 건너 절벽 전체를 뒤덮으며 자라는 덩굴나무가 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수백 년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덩굴나무 줄기는 절벽을 타고 부챗살처럼 뻗어 15m 넘게 올라간 모습이 장관이다. 잎은 반질반질 윤이 나고 짙은 녹색이다. 국내 송악 중 가장 큰 나무여서 천연기념물(367호)로 보호하고 있다. 송악은 한국의 아이비(Ivy)다. 송악은 상록성 덩굴나무인데, 주로 남해안과 제주도 등 남쪽 지방에 분포한다. ‘담장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창 수동리에 가면 수령 400년 넘은 팽나무(천연기념물 제494호)를 만날 수 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경남 창원 북부리 팽나무처럼 주변이 탁 트인 마을 산정에 우뚝 솟아 있는 우람한 팽나무다. 현재 천연기념물 노거수로 지정된 팽나무는 경북 예천 금남리 황목근과 고창 수동리 팽나무 단 2건뿐이다. 수동리 팽나무 그늘 아래 앉으니 언덕 아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에 닿는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도 춤을 춘다.



고창, 영광=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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