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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책의 향기]‘왕자님과 공주’ 서사 뒤집는 화끈한 여자들

입력 2022-07-02 03:00업데이트 2022-07-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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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왕/정보라 지음/280쪽·1만6800원·아작
공주는 자신을 구하러 온 왕자의 기사도 정신을 무시하고, 여성들은 왕좌를 두고 피 튀기는 권력투쟁을 벌인다. ‘저주토끼’(아작)로 올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가 정보라의 새 소설집에 실린 7개 단편은 남성 중심 서사를 뒤집는다. 전작인 ‘저주토끼’는 호러, ‘그녀를 만나다’(아작)는 공상과학(SF) 작품 중심의 소설집이었다. 신간은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한 여성주의 판타지로 구성됐다.

책을 여는 세 챕터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는 차례로 이어지는 3부작이다. 무시무시한 용이 지키는 성에 갇힌 아름다운 공주를 기사가 구한다는 전형적인 서양 판타지를 뒤집었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진취적이고 폭력적인 공주의 등장. 공주는 기사가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리는 법이 없다. 먼저 프러포즈를 하고, 이웃나라 왕비의 저주에 걸려 공주를 죽이려는 기사를 장검과 단검으로 단박에 무찌른다. 탑에 갇힌 공주를 찾아와 “당신을 구하러 왔다”는 기사에게는 “구출 좋아하네”라며 망신을 주기도 한다. 이 3부작은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어로 출간될 예정이다.

3부작의 또 다른 묘미는 정 작가가 전래동화를 옆에서 들려주는 듯한 문체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정리를 한번 하자면’, ‘그러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했다는 말이지’와 같은 구어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서양 판타지가 전통 판소리 구절 위에 얹힌 듯 재밌다. 열 줄 넘게 이어지는 문장도 특유의 말맛 덕에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표제작인 ‘여자들의 왕’은 “아주 농염하고 화끈한 여자들의 관능적 권력투쟁을 써 보고 싶었다”는 작가 말대로 팜파탈의 매력이 흘러넘친다. 모티브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국 초대 왕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2대 왕이 된 다윗 이야기. 요나단은 왕이 되지 못했고, 다윗이 사울에 이어 왕이 됐지만 두 사람은 끝까지 깊은 우정을 유지했다. 작가는 사울과 요나단, 다윗을 모두 여자로 바꿨다. 왕좌를 쟁취하기 위해 위협과 살해, 때로는 유혹까지도 서슴지 않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틀을 깨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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