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문화

‘데모가 취미’라는 소설가… 현실 속 고통을 그려내다[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입력 2022-04-16 03:00업데이트 2022-04-16 03:14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그녀를 만나다/정보라 지음/356쪽·1만4800원·아작
7일 오후 7시 반 정보라 작가(46)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단편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아작)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선정된 직후라 소감을 묻기 위해서였다. 지하철 안 시끌시끌한 소음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냐, 기분이 어떠냐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더니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제가 지금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집회에 참여하고 오는 길이라서 너무 추워요. 그게 소감이에요.”

이 책은 정보라가 지난해 8월 펴낸 중·단편소설집이다. ‘저주토끼’에 환상적인 이야기가 주로 담겼다면 이 책은 조금 현실적인 경향이 담긴 게 특징이다.

특히 표제작 ‘그녀를 만나다’엔 사회 비판적인 시각이 짙게 담겨 있다. 집회에 자주 참여하는 할머니가 테러 용의자로 지목되는 사건을 풍자적으로 다룬다. 군 복무 중 외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강제 전역당한 고 변희수 하사 사건, 성별 나이 인종 학력을 이유로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안도 스치듯 언급된다.

단편소설 ‘Maria, Gratia Plena’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프랑스 남성 경찰관이 자신의 아내와 두 아이를 권총으로 쐈다. 경찰관의 아내는 가정폭력에 오래 시달렸다. 신고를 해도 남편이 경찰관이라 제대로 된 조치가 취해지지 않자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다 사건이 벌어졌다. 아이가 살아남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고민하다 과학적 상상력을 더해 쓴 것이 이 작품이다. 가정폭력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현실과 그 이후의 고통을 작품에 담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정보라는 투쟁하는 작가다. 그는 오랫동안 세월호 유가족 천막을 지켰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에도 참여했다. 그는 사회인으로서도, 작가로서도 애도하는 데 애를 쏟는다. 그가 ‘작가의 말’에서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상실된 사람들을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그리고 행동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이유다.

부커상 심사위원단은 정보라의 작품 세계를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마술적 사실주의’라 평가했다. 이 평가처럼 그는 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 환상의 세계를 쌓아 올린다. 하지만 그 너머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살며 투쟁하는 작가의 의식이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저주토끼’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여러 질의응답이 오갔는데 누군가 취미생활이 뭐냐고 물으니 정보라는 겸연쩍게 웃으며 “데모”라고 답했다. 이 답변이 작가 정보라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문화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