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낯선 이국의 여행지에서 ‘나’를 마주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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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소설/장류진 등 지음/244쪽·1만6000원·창비교육



어느 해 8월 미혼의 젊은 여성인 ‘나’는 엄마, 외삼촌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일본 온천마을 유후인. 여행에서 나는 외삼촌과 조금씩 친해진다. 일본어를 잘하고, 호텔에서 일할 때 손님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당한 일을 잊지 못하며, 밤에 눈감는 일을 무서워하는 외삼촌의 모습을 점차 알게 된다. 2년 뒤 외삼촌은 세상을 떠났고 주인공은 가끔 여행을 추억한다. 그의 기일이면 생전 좋아했던, 소금물에 살짝 데친 풋콩을 제사상에 올리고 묵념한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 여행이 없었다면 자신과 전혀 달랐던 외삼촌을 영영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김금희의 단편소설 ‘모리와 무라’의 줄거리다.


이 책은 7명의 작가가 여행을 주제로 쓴 7개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작품들은 모두 여행자가 탐낼 만한 여행지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작가들은 여행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 대신 여행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들여다본다. 낯선 곳에서 주인공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지언정 타인과 자신에 대한 이해를 얻는다.


윤고은의 ‘콜럼버스의 뼈’에서 주인공 여성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스페인 세비야로 떠난다. 양부모 아래에서 자란 그가 열흘간 휴가를 얻어 이곳까지 온 건 친아버지를 찾기 위해서다. 오후에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 때 거리를 헤매던 그가 마주친 이는 아버지가 아닌 스페인의 다섯 남매다. 어머니는 같지만 각자 아버지가 다른 이들을 보며 주인공은 핏줄이란 무엇인지, 왜 자신이 아버지를 찾아다니는지 고민한다.


여행의 추억 중 하나는 외국에서 만나는 인연이다. 김애란의 ‘숲속 작은 집’에서 여성 디자이너는 물가 수준이 한국의 3분의 1에 불과한 이름 모를 해외 도시로 떠난다. 그곳에서 자신의 숙소를 매일 치워주는 또래 여성 메이드와 그의 10대 딸을 만난다. 주인공은 메이드에게 팁을 줘야 할지, 그를 너무 부려 먹는 건 아닌지 고민한다. 하지만 메이드의 딸은 주인공을 우연히 만난 좋은 인연으로 생각하며 따뜻한 마음을 전한다.

‘여행하는 소설’의 개별 단편소설을 쓴 장류진 윤고은 기준영 김금희 이장욱 김애란 천선란 작가(위 사진부터). 이 책을 엮은 현직교사 4명은 머리말에 ‘여행하면서 마주하는 불안 혼돈 어긋남 절망 이해 희망 성찰 깨달음이 우리 삶을 더욱 다채롭게 한다’고 썼다. 블러썸엔터테인먼트, 신나라, 창비 제공
‘여행하는 소설’의 개별 단편소설을 쓴 장류진 윤고은 기준영 김금희 이장욱 김애란 천선란 작가(위 사진부터). 이 책을 엮은 현직교사 4명은 머리말에 ‘여행하면서 마주하는 불안 혼돈 어긋남 절망 이해 희망 성찰 깨달음이 우리 삶을 더욱 다채롭게 한다’고 썼다. 블러썸엔터테인먼트, 신나라, 창비 제공
여행은 일상에 지친 우리를 다시금 꿈꾸게 만들기도 한다. 장류진의 ‘탐페레 공항’에서 여성 주인공은 6년 전 비행기 경유차 잠시 머문 핀란드 탐페레 공항을 추억한다. 공항에서 핀란드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다. 주인공은 왜 자신이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게 됐는지, 어떤 다큐멘터리 PD가 되고 싶은지 신나게 말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현재 주인공은 안정된 보수를 주는 회사에 다니며 꿈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과거를 떠올리던 주인공은 다시 PD의 꿈을 좇기로 마음먹는다.

이 밖에 기준영의 ‘망아지 제이슨’은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성스러운 신들의 고향 인도 바라나시로, 천선란의 ‘사막으로’는 모래폭풍이 부는 사막으로 우리를 각각 데려간다. 여행지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하늘을 찌를 듯한 초고층 빌딩도, 갠지스강의 이국적 풍경도,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도 아니다. 나는 무얼 위해 살아가는지, 어떻게 꿈꿀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나를 마주하는 과정, 그것이 여행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여행하는 소설#장류진#윤고은#기준영#김금희#이장욱#김애란#천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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