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선 깨부순 세계 첫 철갑선 데뷔… ‘무적함대’ 거북선의 함성 들리는 듯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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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남해 역사탐방 경남 사천
16세기말 해전 벌어진 이순신바닷길
동아시아 국제전 격전지 선진리성
산-바다-섬 아우른 천혜의 관광지

경남 사천시 서포면 별학도에 조성된 비토해양낚시공원(가운데). 부양식 낚시잔교 및 돔형 수중 펜션, 수변 덱 등이 설치돼 있어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불린다. 오른쪽 상단의 섬이 ‘별주부전 테마파크’가 있는 비토섬이다.
경남 사천시 서포면 별학도에 조성된 비토해양낚시공원(가운데). 부양식 낚시잔교 및 돔형 수중 펜션, 수변 덱 등이 설치돼 있어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불린다. 오른쪽 상단의 섬이 ‘별주부전 테마파크’가 있는 비토섬이다.
《12월의 겨울은 과거를 교훈 삼아 미래를 설계하라는 시령(時令)이 내려진 시기다. 옛사람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지혜를 배우는 역사 여행을 하기에도 좋은 때다. 남쪽의 따스한 겨울 햇살을 쐬면서 역사 탐방을 즐길 수 있는 남해 한려수도의 중심 사천시를 찾았다. 오미크론 변이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겨울철 비대면 안심관광지(25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사천해전의 현장 무지갯빛 해안도로

사천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을 테마로 삼은 ‘이순신바닷길’이 있다. 총 60km 거리의 해안 도보 여행길이다. 이 중 사천해전이 코앞에서 벌어진 사천시 용현면 선진 앞바다의 해안도로를 특별히 ‘최초 거북선길’로 명명해 기념하고 있다. 남쪽 모충공원에서 북쪽 선진리성까지 12km 거리인데,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대포항 방파제에 설치된 포토존 ‘그리움이 물들면’ 조형물(최병수 작가 작품).
대포항 방파제에 설치된 포토존 ‘그리움이 물들면’ 조형물(최병수 작가 작품).
1592년 음력 5월 29일 전남 여수에 본영을 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사천 앞바다에 왜선 13척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듣고 출전을 결정한다. 거제도 옥포해전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후 두 번째 출전하는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은 처음으로 거북선 2척을 실전 투입했다. 돌격용 거북선은 조선 수군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투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왜군 쪽으로 곧장 쳐들어가 화포를 쏘아대며 세키부네(왜군 함선)를 하나둘씩 깨부수어 나갔다. 대장선의 이순신 장군 역시 선두에 나서 20여 척의 판옥선을 지휘하며 왜선들을 격파했다. 왜선과의 근접 전투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어깨에 총탄을 맞기도 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왜선 모두를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왜군들은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비밀병기 거북선을 보고 처음으로 두려움과 공포에 떤 반면, 조선 수군은 비로소 이순신 장군에 대한 무한 신뢰와 함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16세기 최첨단 전투선인 거북선이 등장했던 사천 바닷가는 지금 무지갯빛으로 변신해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도로변 6.2km 구간의 방호벽 연석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로 칠해 놓은 무지갯빛 해안도로다. 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면 여성의 옆얼굴을 윤곽선으로 표현한 ‘그리움이 물들면’ 조형물(사천대포항 부두), 하트 모양의 포토존 입구에서 갯벌 쪽으로 길쭉하게 뻗어나간 부잔교갯벌탐방로(용현면 금문리), 노란 초승달 모양의 포토존 ‘노품달’(노을 품은 달, 용현면 종포방파제) 등이 차례대로 나타나 피곤한 발품을 넉넉히 보상해준다. 최근에는 남녀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와 인생샷 명소로도 부상하고 있다.

무지갯빛해안도로의 부잔교갯벌탐방로 입구에 설치된 하트모양 포토존은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무지갯빛해안도로의 부잔교갯벌탐방로 입구에 설치된 하트모양 포토존은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무지갯빛 해안도로를 걸어가며 맑은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닷물처럼 청량한 하늘에서는 비행기 한 대가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사천이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첨단항공우주과학관 등이 들어선 첨단 항공산업의 메카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16세기 조선의 바다를 지키던 거북선처럼 21세기 우주를 누비는 최첨단 비행체가 사천에서 출현하기를 해와 달에게 빌어 보았다.

○포르투갈 특전사-타타르 거인까지 참여한 국제전

무지갯빛 해안도로를 따라 더 북상하면 마침내 ‘최초 거북선길’의 종착지인 선진리성(용현면 선진리 770)이 나타난다. 1597년 임진왜란에 이어 제2차 전쟁인 정유재란 발발 당시 왜군들이 주둔했다 하여 사천왜성으로도 불리는 성이다. 성벽 둘레가 1km 남짓한 이 성은 해발 30m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에서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제전이 벌어졌다. 1598년 10월 3만 명 규모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1만여 왜군이 주둔 중인 사천왜성을 공격한다. 이 사천왜성 전투는 다국적 특수군이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명 연합군은 공성(攻城)용 대포인 불랑기포를 쏘아대고 포르투갈계 특수군인 해귀(海鬼), 키와 몸뚱이가 보통사람의 10배나 된다는 타타르계 거인(巨人) 등 다국적 출신 용병들까지 동원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명나라 진영 내 불랑기포 화약궤가 폭발하는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명군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탄 왜군들의 기습 공격으로 조명 연합군 7000∼8000명이 어이없게 전사하는 패배를 겪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포함한 7년 전쟁에서 왜군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 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표방하는 일본군 전승지로 관리됐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들은 1918년 성터 일부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하고 벚나무 1000여 그루를 심는 등 시마즈 가문을 위한 현창 장소로 활용했다. 그러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활약을 기념한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지고, 6·25전쟁 당시 전사한 대한민국 공군 위령탑도 조성됐다. 역사적 장소가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후대에 재해석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선진리성은 일제강점기 조성된 벚나무로 벚꽃 축제로 유명하다. 또 일본식 경사진 성벽, 일본 히지메성을 본떠 복원한 성문 등이 당시의 왜성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정유재란 당시 대규모 국제전이 벌어졌던 사천왜성. 그 앞바다에서는 1592년 음력 5월 거북선이 처음 투입된 사천해전이 벌어졌다.
정유재란 당시 대규모 국제전이 벌어졌던 사천왜성. 그 앞바다에서는 1592년 음력 5월 거북선이 처음 투입된 사천해전이 벌어졌다.
선진리성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는 사천 조명군총과 이총(耳塚)이 있다. 조명군총은 사천왜성 전투에서 숨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집단 무덤이다. 당시 왜군은 전사자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 후 일본에 보냈고 부패한 시신들을 한데 수습해 무덤을 만들었다. 이총은 1992년 사천문화원과 삼중 스님이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자 일본 교토 대불전 앞의 코무덤 흙 일부를 가지고 와서 조성한 후, 200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코보다는 귀를 베어 간 것으로 하는 게 덜 잔혹하게 보인다고 생각했을까. 에도막부 시대(1603∼1868)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은 코무덤 즉 비총(鼻塚)을 이총으로 둔갑시켰다. 사천의 이총은 역사적 사실을 교묘히 윤색하는 일본의 행태를 고발하는 현장이다.

○산·바다·섬을 아우르는 사천 명물 케이블카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대방진굴항.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잠시 숨겨놓은 곳이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대방진굴항.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잠시 숨겨놓은 곳이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 선진리성에서 떠나 창선·삼천포대교가 지척에 보이는 대방진굴항(대방동 251)을 찾았다. 이곳도 이순신 장군과 인연이 닿은 장소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진영이 있었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거북선을 숨겨두고 굴이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을 채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조선 순조 때 돌로 둑을 쌓아서 활처럼 굽은 만을 만들고 인조항구인 굴항을 설치했다.

복원된 지금의 대방진굴항은 아담하고 한적한 공원 같다. 바닷물이 얕게 들어찬 굴항에는 주민들이 사용하는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고, 수령 200년의 팽나무가 초록빛 물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삼천포항과 창선·삼천포대교를 감상하며 산책하기에 좋은 코스다.

바다와 섬과 산을 넘나드는 사천바다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낙조.
바다와 섬과 산을 넘나드는 사천바다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낙조.
창선·삼천포대교 바로 위로는 사천바다케이블카가 연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2018년 4월에 개통한 이 케이블카는 바다와 섬과 산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방정류장에서 출발한 케이블카는 초양정류장(초양도)에서 한 번 정차한 후 다시 대방정류장을 곧장 지나쳐 각산전망대가 있는 각산정류장으로 향한다. 각산전망대에서는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사천 8경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비토섬의 끝자락에 있는 월등도. 수심이 4∼5m인 진입로는 하루 두 차례 2시간 남짓 바닷길이 열린다. 사천의 ‘이순신바닷길 제3코스’이기도 하다.
비토섬의 끝자락에 있는 월등도. 수심이 4∼5m인 진입로는 하루 두 차례 2시간 남짓 바닷길이 열린다. 사천의 ‘이순신바닷길 제3코스’이기도 하다.
한편 각산에는 편백나무 향기가 가득한 ‘사천케이블카 자연휴양림’이 올 8월 문을 열어 운영되고 있다. 숙박동과 캠핑이 가능한 야영 덱, 숲 탐방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별주부전’ 전설을 테마로 한 비토섬도 둘러볼 만하다. 비토해양낚시공원, 별주부전 테마파크,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리는 ‘월등도 신비의 길’(이순신바닷길 제3코스) 등 사천의 또 다른 비경이 기다리고 있다.






글·사진 사천=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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