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강도?…안중근 본받으려던 임시정부 특무정사! [동아플래시100]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4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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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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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동소문파출소 앞에서 권총이 불을 뿜었습니다. 경계근무 중이던 일본인 순사가 쓰러졌죠. 죽을힘을 다해 파출소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순사에게 총탄 6발이 더 쏟아졌습니다. 이때가 1926년 7월이었죠. 2개월 뒤 경기도 안성군의 이름난 부자 박승륙 집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박승륙의 맏아들이 총에 맞아 숨졌죠. 한 달 뒤에는 경기도 이천군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습격당해 면서기 한 명이 사살됐습니다. 같은 달에 경성 수은동, 현재 묘동의 한 전당포에서 주인의 친형이 총상을 입어 즉사했죠. 3개월 사이에 4건의 총격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겁니다. 공통점은 범인이 청년 같고 귀신같이 사라진 점이었죠. 경성과 경기도 일대가 발칵 뒤집혔고 무장경찰이 경계에 나서 마치 계엄령이 내려진 듯했습니다.

①일제 경찰에 붙잡힌 이수흥 ②6촌 형의 밀고로 붙잡힌 뒤 담요가 씌워진 채 압송되는 이수흥 ③경성 수운동 전당포를 습격한 유택수 ④이수흥의 친구로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한 유남수


청년은 이천 출신의 스물한 살 이수흥이었습니다. 신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만(駐滿)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였죠. 이 무렵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은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등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중 참의부는 과거 의병계열이 주축이었습니다. 이수흥은 일찍이 일제의 심한 민족차별에 분개해 19세 때 혼자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합류했죠. 우연인지 그곳에서 예전 의병계열 의군부의 총장을 지낸 채상덕을 만나 그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채상덕은 이수흥의 아버지 이일영과 면암 최익현 휘하의 의병으로 인연을 맺었더랬죠. 이일영은 58세 때 늦둥이 이수흥을 낳았고요. 이수흥은 채상덕을 부친처럼 따랐고 채상덕은 이수흥을 신명무관중학교에 보내 독립군이 되도록 키웠습니다.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죠.

①이수흥이 1926년 7월 경성에 잠입한 뒤 일본인 순사에게 총격을 가한 동소문파출소 ②유택수가 습격한 경성 수운동 전당포에서 현지 조사를 하고 있는 일제 검경


1925년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습니다. 참의부 최고지휘관을 비롯한 대원 60명이 만주 지안현 고마령에서 군사회의를 열었죠. 이수흥도 참석했죠. 첩보로 이를 파악한 일제가 급습해 이수흥 등 3명을 제외한 전원이 몰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이수흥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죠.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이수흥에게 보고를 받은 채상덕은 이수흥이 완쾌되자 “안중근을 본받으라”며 권총 2정을 갖게 해줍니다. 훈련부족과 배신자 속출로 단체행동은 틀렸으니 개인행동을 하란 뜻이었죠. 채상덕 자신은 ‘내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무슨 면목으로 살겠느냐’며 기어이 음독 순국했고요. 스승이자 아버지 같던 채상덕의 피맺힌 유언에 따라 이수흥은 일제 고관 암살과 군자금 확보를 위해 만주를 떠납니다.

①일제 경찰이 경기도 이천군에서 체포한 이수흥 일행을 자동차에 태운 채로 나룻배에 실어 한강을 건너 경성으로 압송하고 있다. ②이수흥이 탄 차를 동아일보 사진기자 차량이 추격하며 사진을 찍었다. 동아일보는 총독부가 4대 총격사건의 보도를 금지한 상황에서도 지국망을 총동원해 취재를 해놓은 덕분에 보도금지가 풀린 1926년 11월 17일에 2개면 호외를 낼 수 있었다.


일단 이수흥은 조선총독부 급사로 일한다는 먼 친적이자 고향 친구인 유남수와 함께 암살을 실행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간신히 경성에 와보니 유남수는 이천으로 돌아갔다고 했죠. 허탈해진 이수흥은 그래도 고향에서 유남수를 만나고 그 형 유택수와 의기투합해 군자금 확보에 나섰습니다. 1926년 경기 일대의 4대 총격사건은 이들이 주도했죠. 전당포사건은 유택수가 맡았고 나머지는 이수흥이 앞장섰다고 일제는 결론지었습니다. 하지만 신출귀몰했던 거사는 6촌 형의 밀고로 끝이 나고 말았죠. 은신하던 이천의 6촌 형 집에서 붙잡혀 경성으로 압송되던 이수흥은 자신이 탄 차량을 따라붙는 동아일보 사진기자의 차를 보더니 빙긋 웃고는 머리를 끄덕여 인사했답니다. 그의 배포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겠죠.

①이수흥이 얼굴을 가린 용수를 쓴 채 1928년 6월 28일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②법정에 선 피고 중 맨 앞이 이수흥, 가운데가 유남수, 뒤가 유택수로 보인다. ③이수흥 일행의 재판을 보기 위해 방청권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④방청권을 받고 법정으로 들어가는 데도 줄을 서야 했다.


2년 뒤 재판에서 이수흥은 모든 일은 자신이 저질렀다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사에게 ‘택수, 남수 두 형제가 공연히 욕을 당하는 것이 실로 민망하’다며 적극 변호해 달랬죠. 하지만 이수흥 유택수는 사형, 유남수는 징역 2년형이었죠. 이수흥은 일체 상소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형선고에도 상소하지 않은 이는 허위 강우규 이수흥 3명뿐이라고 했죠. 결국 1929년 이수흥는 형장의 이슬이 됐죠. 다만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이수흥은 독립운동이나 자선을 많이 한 부잣집에도 군자금을 요구했죠. 사람을 해치기도 했고요. 앞길을 가로지른 일본 여인에게도 총을 쐈죠. 큰일 하려는데 불길하다면서요. 부친이 숨지자 열일 제쳐놓고 초상을 치렀습니다. 이성을 앞선 혈기와 유교적 세계관 탓이었다고 짐작해 봅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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