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 없음’이 가져온 감성 살리기…‘밤을 걷는 밤’ 인기 비결은?

이호재기자 입력 2020-12-15 15:02수정 2020-12-1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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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서울의 거리를 걷는다. 출연자는 단 한 명, 가수 유희열(49) 뿐이다.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종로구 청운효자동의 익숙한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생전 처음 용산구 후암동 해방촌 거리를 걷기도 한다. 홀로 산책하고 서울의 야경만을 비추는 심심한 방송을 누가 볼까 싶지만 올해 9월 시작한 뒤 15회 만에 누적 조회수 560만 회를 넘겼다. 카카오TV의 예능 프로그램 ‘밤을 걷는 밤’ 이야기다.

● 코로나 시대 ‘홀로 걷기’가 통하다

출연자도, 내레이션도 없는 이 잔잔한 산책의 인기 비결은 ‘감성’이다. 카메라는 오르막길을 오르다 숨이 찬 노모(老母)의 등을 슬며시 밀어주는 딸의 모습을 멀찍이서 찍고, 유희열은 비가 쏟아질 땐 짜증을 내기 보단 “소리가 괜찮다”고 감탄한다. 이 같은 감수성을 살리는 데엔 ‘감성 변태’라는 별명이 붙은 유희열의 기민한 관찰력 덕이기도 하다. 배우 한지민이 출연한 한 회를 제외하곤 ‘토크’가 없지만 사람들은 유희열의 혼잣말에 귀를 기울인다.

‘연출 없음’이 가져온 효과라는 분석도 있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안은 “서울의 밤을 걷는다”는 단 한 줄 뿐이다. 각 회마다 “오늘은 이곳을 걷는다”는 것만 정할 뿐 대본도 없다. 밤을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조명을 쓰지 않는다. 가끔씩 무엇인가를 비춰야 할 때면 유희열이 스마트폰의 조명을 켜는 정도다. “산책이라는 건 길을 잃어야 한다”며 샛길로 빠지기도 한다. 슈퍼 앞을 걷다 뽑기가 하고 싶어지면 “지갑이 없다”며 제작진의 돈을 빌릴 정도로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 작품의 문상돈 PD는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최대한 작위적이지 않게 촬영하기 위해 어두운 곳에선 어둡게 찍고, 밝은 곳에선 밝게 찍는다”며 “방송은 출연자의 얼굴과 표정이 잘 보여야 하고, 조명도 있어야 한다는 기존 방송의 문법을 거부했다”고 했다. 또 “대본이 없는 상황에서 터지는 순간의 장면들이 재밌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재미가 리얼하고 요즘 흐름에 맞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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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홀로 사색하는 취미인 산책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문 PD는 “현대인이 여가 시간으로 뭘 해야 할까라고 고민하다 가장 하기 쉽고, 좋은 것이 걷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서울은 걸어 다니면 확실히 보이는 게 많은 도시다. 차로 가면 차도 외에 볼 수 없는데 걸으면 세세하게 많이 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 스마트폰 맞춰 세로 화면으로 편집

이 프로그램은 스마트폰에서 보기 적합하게 기존 방송 편집 기준인 가로가 아니라 세로 화면으로 편집됐다. 시청자들이 이어폰을 꼽고 거리를 걷는 것처럼 느끼도록 음향에도 세심히 신경을 썼다. 스마트폰은 TV와 달리 개인이 하나씩 지니고 있어 ‘개인화’되고 있는 만큼 홀로 조용히 사색에 빠질만한 거리의 소리 구현이 중요했다.

문 PD는 “세로 화면은 위아래로 길어서 그 거리를 직접 걷는 느낌이 있다”며 “스마트폰에서 할 수 있는 화면 기교를 시도하려 한 건 디바이스를 넘어선 콘텐츠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또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에 누군가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생생한 사운드를 살리고 싶었다”며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사운드 엔지니어 역을 맡았던 배우 유지태가 커다란 마이크로 음향을 담아낸 것처럼 촬영 이후에도 그 거리에 다시 가 소리를 담아왔다”고 했다.

색다른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건 플랫폼의 특성 덕이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카카오M이 모바일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선보이면서 기존 방송계와 차별화를 꾀했다는 것이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기존 방송사들은 인력과 예산을 많이 투입하는 큰 프로젝트로 성공하려는 경향이 강해 ‘밤을 걷는 밤’처럼 조용하고 감성적인 아이템은 다루기 쉽지 않다”며 “스마트폰이라는 새롭고 거역할 수 없는 새 플랫폼에 맞춰 방송 프로그램이 변화한 사례”라고 했다.

이호재기자 hoho@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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