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그리움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걸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20-10-07 03:00수정 2020-10-0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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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1〉 기다림의 윤회
영화 ‘5일의 마중’에서 기억을 잃은 펑안위(왼쪽)는 남편이 바로 옆에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매월 5일이 오면 기차역에 나가 남편을 애타게 기다린다. 동아일보DB
《한시(漢詩)를 읽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이 연재에선 한시를 이미지 중심으로 읽어보려 한다. 이 모험의 동반자는 영화다. 한시와 영화는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예기치 않게 연결되고 원치 않게 맞물려 왔다. 한국 현대시가 서구 이미지론에 신세를 진 만큼이나, 그들 역시 한자와 한시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새롭다고 받아들인 이미지가 오래된 유물로부터 유래한 사실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 만남은 음양(陰陽)이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상반돼 보이지만 끝내 연관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고대에는 무소의 뿔에 양쪽 끝을 이어주는 흰 줄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나라 이상은(李商隱·812∼858)은 “우리 마음엔 무소뿔의 흰 줄처럼 통하는 것이 있다네(心有靈犀一點通·심유영서일점통)”라고 읊은 적이 있다. 이 뿔의 한쪽 끝에는 한시가 또 다른 끝에는 영화가 있다.》

기다림의 간절함은 그리움과 비례한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운 이를 기다리는 장소는 어디인가. 고려시대에는 천수문(天壽門)이 그곳이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쓴 절절한 기다림의 노래가 최사립(崔斯立·생몰 미상)의 ‘기다리며(待人·대인)’다. 천수문은 개성 동문 밖 천수사(天壽寺) 옛터에 있던 문으로, 고려조 500년간 손님을 송영하던 장소였다. 천수문에 날리는 버들개지는 봄바람 봄풀 낙화 버들가지 매화 달 등과 마찬가지로 한시에서 이별과 그리움을 장식하는 전형적 이미지다.

시의 화자가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분명치 않다. 고인(故人)은 친구일 가능성이 높지만, 헤어진 남편이나 옛사랑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눈이 뚫어지게(眼穿·안천)’ 기다려보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는다. 이 시로 인해 최사립은 당시 사람들에게 ‘최안천(崔眼穿)’이라 일컬어졌다. 마지막 구절의 “가까이 오니 그 사람 아니구나(近却非)”도 인상적인데, 당나라 한유(韓愈·768∼824)의 “풀빛인가 멀리 바라보다 다가가면 간 곳 없구나(草色遙看近却無·초색요간근각무)”에서 온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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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간절한 기다림은 중국 장이머우 감독의 ‘5일의 마중’(2014년)에서도 만날 수 있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 루옌스는 문화대혁명 와중에 우파분자로 지목돼 아내 펑완위와 생이별하게 된다. 광풍이 지나고 루옌스가 돌아오지만 펑완위는 심인성 기억장애로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다. 과거 수용소를 탈출해 온 남편을 돕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펑완위는 5일에 돌아온다던 루옌스를 마중하기 위해 매달 5일이 되면 역으로 나가 애타게 남편을 기다린다. 자신 옆에 루옌스가 있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기억 속 남편은 끝내 오지 않는다.

원작인 옌거링의 장편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루옌스와 가족이 겪은 억압과 고통의 상처들이 사회비판적 요소들과 함께 생략돼 있다. 하지만 이 지점이 오히려 한시처럼 간절한 기다림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한시 역시 마찬가지다. ‘기다리며’의 마지막 구절 근각비(近却非)라는 표현이 어색하다거나 ‘인(人)’자가 중복 사용됐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작은 흠결이 그리움의 절절함을 덜어내진 못한다. 비교하자면 한시에서 세 글자로 포착된 것이 영화에선 여러 차례 반복돼 스크린에 등장할 뿐이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의 시공간은 언제나 기시감 속에 반복되면서도 끝내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황지우 시인이 썼던 것처럼 미리 가 기다리는 동안 모든 발자국이 가슴에 쿵쿵거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너였다가/너일 것이었다가/다시 문이 닫힌다’(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 아마도 그 사람은 끝내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 천수원도 퇴락했다. 이곳을 다시 기다림의 장소로 환기시킨 것도 이 시였다. 상전벽해가 되어도 기다림의 마음만은 오롯이 남아 전한다. 영화도 시도 윤회처럼 반복되는 우리 모두의 애틋한 기다림을 담고 있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한시#기다림#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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