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금관총 유물을 경성으로? 경주 땅도 떼 가라!”

정경준 기자 입력 2020-07-11 11:40수정 2020-07-1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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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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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9월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이 금관은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돼 국보 87호로 지정됐다.

천년 고도(古都) 경주는 ‘밭고랑에서 김매는 농부의 호미자루에도 보물이 걸려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적이 많은 곳입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1921년 9월 노서동 주민 박모 씨 집 공사 때 유리구슬이 쏟아져 나온 겁니다. 심상치 않다 싶어 27일부터 발굴을 시작했는데 순금 관(冠)을 비롯한 허리띠, 팔찌, 귀걸이, 귀걸이, 가락지 등 금제품과 칼, 토기, 마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이때 나온 유물의 금 무게만 해도 7.5㎏이라고 합니다. ‘出’자 모양의 3단 장식이 붙은 이 금관은 최초로 발굴된 신라 금관이어서 고분 이름도 ‘금관총’입니다.

금관총 발굴은 이집트 투탕카멘 유적 발굴에 비견되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노서동의 서봉총, 길 건너 노동동의 금령총, 식리총 등 경주고분 발굴을 본격화했고, 한편으로는 고분을 몰래 파헤치는 도굴도 횡행했습니다.

그런데 금관총 발굴 과정에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문가 한 명 없이 일본인 아마추어들의 손으로 나흘 만에 이뤄져 많은 유물이 손상됐고, 현장조사도 주먹구구였던 겁니다. 총독부는 뒤늦게라도 유물을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며 이를 경성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그러자 경주시민들이 두 차례나 궐기대회를 열어 “신라의 유물을 경주에 영구 보관하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우리 문화재를 약탈하는 데 혈안이 됐던 일제에 대한 불신도 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그 해 10월 22일자 3면 기사 ‘경주시민의 분기(奮起)’에서 금관총 발굴 사실과 함께 시민들의 움직임을 보도했습니다. 이어 11월 7일자 ‘경주의 옛 기물 문제에 대하여’에서는 ‘경주의 유물을 경성으로 가져간다면 무게로 다는 금값 외에 무슨 가치가 있느냐. 차라리 첨성대와 다보탑, 석굴암과 안압지, 아니 경주 땅덩어리도 떼어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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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주에는 유물들을 제대로 보관할 공간도 마땅치 않아 금관총 유물들은 경성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유지들이 앞장서 십시일반 갹출한 성금으로 진열관을 지어 유물들을 되찾아온 것입니다. 1926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된 이 진열관은 오늘날 국립경주박물관의 모태인 셈입니다.

금관총 유물들은 두 차례나 수난을 겪었습니다. 1927년 12월 경주분관에 진열해놓은 유물 90여 점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범인이 금제 유물들을 팔기 위해 녹이거나 부수지 않을까 우려해 경북 경찰병력의 절반이 달라붙었지만 잡을 수 없었는데 약 6개월이 지난 다음해 5월 대부분의 유물이 경주경찰서장 집 문밖에서 발견돼 한고비를 넘겼습니다. 1956년엔 전시 중인 금관이 도난당했지만 다행히 모조품이었습니다.

금관총 발굴을 주도한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 1908년 한반도로 건너와 경주에서 대서업을 하던 그는 신라 문화재 전문가로 행세했으나 수많은 유물을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경주의 신라 유물들은 끊임없이 절도의 표적이 됐지만, 진짜 도둑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금관총 ‘날림 발굴’을 주도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대표적입니다. 대서사에서 문화재 수집가로 변신한 그는 경주를 찾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사이토를 안내하며 권력과 가까워진 덕에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에 오르며 승승장구했지만 대놓고 유물을 빼돌리다 꼬리를 잡혀 1933년 체포됩니다. 그가 훔쳐간 유물들은 1965년 한일수교 때 돌려받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는지는 밝혀내야 할 숙제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15년 공개한 금관총 출토 칼집 장식. ‘이사지왕의 칼’이라는 뜻의 문구가 새겨져 있어 고분의 주인을 밝혀낼 수 있을지 주목됐으나 아직까지 고증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금관총은 2013년 다시 한 번 화제가 됐습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칼집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가 발견돼 발굴 90여 년 만에 고분의 주인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커진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년 뒤 금관총을 재발굴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이사지왕의 칼)’라 새겨진 칼집 장식 등을 추가로 찾아냈지만 더 이상의 단서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책에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 이사지왕, 그는 과연 금관총의 주인일까요?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원문
新發掘(신발굴)한 古物(고물) 問題(문제)로

慶州市民(경주시민)의 奮起(분기)


신라의 보물은 경주에 두라
경주시민의 고젹 보호운동

경상북도 경주(慶北 慶州‧경북 경주)는 신라(新羅‧신라) 일천년의 녯 도읍으로써 찬란한 조선의 고문화(古文化‧고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명승과 고적이 도처에 산재하야 문밧게 발만 내어노하도 창연한 고색을 띄운 자최를 볼 수가 잇스며 밧고랑에 업대어 무심히 김매는 농부의 호미자루에도 녯날의 유물이 걸니어 나오는 수가 만핫섯다.

지난 구월 이십칠일에 경주읍내 봉황대(鳳凰臺‧봉황대) 서편에 잇는 큰 고분(古墳‧고분)에서 쳔고의 유물이 다수히 발굴되엿는대 이 고분은 석씨(昔氏‧석씨)의 능이라고도 하며, 혹은 당시(當時‧당시) 어느 신하(臣下‧신하)의 묘라고 하야 임자를 알기 어려운 큰 고분으로써, 지금부터 략 십여 년 전에 시가정리로 인하야 몸동이의 반을 일허버리고 반만 남어 동리 사람들의 공동 사용하는 흙구덩이로 변하엿든 것이다.

그날도 그 겻 집에 잇는 박모(朴某‧박모)가 벽을 바르랴고 흙을 파다가 우연히 유리(琉琳‧유림)로 만든 구슬(珠‧주)이 만히 나옴으로 집어들고 야단을 하는 즈음에 지나가든 일본인 순사 한 명이 그것을 보고 즉시 경찰서에 보고하엿든 바, 서장 이하 다수한 경관이 현장에 나아가 발굴(發掘‧발굴)에 착수한 결과 어든 물건은 지금부터 략 일천사백여 년 전의 고물인대

순금으로 만든 왕관(王冠‧왕관)과, 띄(帶‧대) 장식품과, 팔(腕‧완) 장식품과, 지환(指環‧지환)과, 귀(耳‧이) 장식품과, 순은으로 만든 왕관(王冠‧왕관)과 청동(靑銅‧청동)으로 만든 신(靴‧화) 장식품과, 솟(鼎‧정)과, 칼(刀‧도)과, 창(槍‧창)과, 다수한 비취옥(翡翠玉‧비취옥)과, 토긔(土器‧토기)와, 마구(馬具‧마구)와, 유리구슬 등이 다수히 발굴되엿스며, 사흘을 계속하여 판 것이 석유 궤로 십여 개나 되얏는대 그 만흔 보물은 젼부 원형(原形‧원형)을 잘 보존하여 왓슴으로 연구하기에 충분한 자료가 될 듯하며, 근일은 구경오는 사람, 연구하러 오는 사람이 련락부절하는 상태에 잇다.

총독부에서는 이 고물 전부를 경성(京城‧경성)에 옴기어 간다는 소문이 잇는대 력사뎍(歷史的‧역사적) 유물은 력사를 배경(背景‧배경)으로 한 그 디방에 보관하는 것이 당연함으로 경주시민은 두 번이나 시민대회를 열어 『신라의 유물인 쳔고의 귀중품은 영구히 우리 경주에 보관할 사, 이 목뎍을 달하기 위하야 본회는 당국에 탄원할 사』 등의 결의를 하고 일변 총독부에 탄원의 뎐보를 노흐며, 일변 박물관(博物館‧박물관) 지부(支部‧지부) 설치의 청원서를 제출하며 총독부에 대표자를 보내어 진정하기로 결의하엿는대 대표 십여 명은 지난 십구일 경성을 향하야 츌발하엿다더라. (경주)




현대문
새로 발굴한 유물 문제로

경주시민들이 떨쳐 일어나

“신라의 보물은 경주에 두라”
경주시민의 유적 보호운동

경상북도 경주는 신라 1000년의 옛 도읍으로, 찬란한 조선의 옛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명승고적이 도처에 흩어져 있어 문 밖에 발만 내놓아도 창연한 고색을 띤 자취를 볼 수 있으며 밭고랑에 엎드려 무심히 김매는 농부의 호미자루에도 옛날 유물이 걸려나오는 수가 많았다.

지난 9월 27일 경주읍내 봉황대 서편에 있는 큰 고분에서 먼 옛적 유물이 다수 발굴됐는데, 이 고분은 신리 왕 석 씨의 능이라는 설도 있고, 혹은 당시 어느 신하의 묘라는 설도 있어 임자를 알기 어려운 큰 고분으로, 지금부터 약 10여 년 전에 시가 정리로 인해 몸뚱이의 반을 잃어버리고 반만 남아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흙구덩이로 변했던 것이다.

발굴된 그날도 현장 주변의 집에 있던 박모 씨가 벽을 바르려고 흙을 파다 우연히 유리로 만든 옥구슬이 많이 나오므로 집어 들고 떠들썩하게 법석거리자 지나가던 일본인 순사 한 명이 그것을 보고 즉시 경찰서에 보고해 서장 이하 많은 경관이 현장에 가 발굴에 착수한 결과 얻은 물건은 지금부터 약 1400여 년 전의 유물인데,

순금으로 만든 왕관, 띠 장식품, 팔 장식품, 가락지, 귀 장식품, 순은으로 만든 왕관, 청동으로 만든 신 장식품, 솥, 칼, 창, 비취구슬 다수, 토기, 마구(馬具), 유리구슬 등이 수없이 발굴됐으며, 사흘을 계속해서 판 것이 석유 궤짝으로 10여 개나 됐다는데 그 많은 보물은 모두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므로 연구하기에 충분한 자료가 될 듯하며, 이후 여러 날 동안 구경하러 오는 사람, 연구하러 오는 사람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는 상태다.

그런데 총독부가 이 유물을 모두 경성으로 옮겨간다는 소문이 있는데, 역사적 유물은 역사를 배경으로 한 그 지방에 보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므로 경주시민들은 두 번이나 시민대회를 열어 ‘신라의 유물인 천고의 귀중품은 우리 경주에 영구 보관할 것,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모임은 당국에 탄원할 것’ 등을 결의하고 한편으로 총독부에 탄원 전보를 놓으며, 한편으로는 박물관 지부를 설치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며 총독부에 대표를 보내 진정하기로 했다. 대표 10여 명은 지난 19일 경성을 향해 출발했다 한다.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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