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총독부 폭파’ 의열단 첫 거사 실패는 친일 경찰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7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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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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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여파가 점차 가라앉던 1919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한 중국인 집에 조선 청년 13명이 모였습니다. 밤샘 토론 끝에 이튿날인 10일 새벽 이들은 급진적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의열단’이 탄생한 순간이죠. 의열단이라는 이름은 ‘공약 10조’의 첫 번째인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키로 함’에서 따왔습니다.

의열단은 조선의 절대독립을 목표로 삼아 암살 파괴 폭동의 수단을 선택했습니다. 만세시위로는 독립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죠. 암살 대상은 7개로 좁혔습니다. 이른바 ‘7가살(可殺)’이죠.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친일 양반지주)입니다. 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왜적의 주요 기관 등 ‘5파괴’로 정했죠. 공격 대상이 분명했기 때문에 의열단 투쟁은 무차별 테러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의열단 단장은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라는 인사말로 유명한 김원봉이었습니다. 당시 21세의 피 끓는 청년이었죠. 의열단에는 밀양 사나이들이 많았습니다. 김병환 윤세주(일명 윤소룡) 황상규 등이 밀양 출신입니다. 부단장 이종암은 대구 출신이고 단원 신철휴는 고령 태생으로 영남 사람들이 다수였죠. 이들을 이어준 것은 신흥무관학교였습니다. 김원봉을 비롯한 여러 의열단원이 신흥무관학교 동문이었기 때문이죠.

조선총독부의 일제감시대상 기록카드에 있는 초기 의열단 단원들 사진. 뒷줄 왼쪽부터 이성우 김기득 강세우 곽재기 김원봉. 앞줄 앉은 사람은 정이소. 오른쪽 아래는 나중에 덧붙인 김익상. 사진 제공=국사편찬위원회
조선총독부의 일제감시대상 기록카드에 있는 초기 의열단 단원들 사진. 뒷줄 왼쪽부터 이성우 김기득 강세우 곽재기 김원봉. 앞줄 앉은 사람은 정이소. 오른쪽 아래는 나중에 덧붙인 김익상. 사진 제공=국사편찬위원회

의열단은 첫 거사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3곳을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1920년 3월 가까스로 폭탄 3개를 구한데 이어 폭탄 13개와 권총 2개를 추가로 확보한 뒤 밀양 김병환 집에 숨겨 놓았죠. 청주 출신 곽재기, 함북 경원이 본적인 이성우, 윤세주, 신철휴 등이 숨어들어와 기회를 살폈습니다. 하지만 막판에 정보가 새나가 경성부 인사동에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선 자가 일제 고등경찰 김태석이었습니다. ‘노인 의사(義士)’ 강우규를 붙잡은 바로 그 자였죠. 총독부는 보도를 막은 채 가혹한 취조를 벌여 총 26명을 줄줄이 잡아들였습니다. 그만큼 총독부는 의열단의 대담한 공격시도에 큰 충격을 받았죠. 총독부는 한 달 보름 지난 7월 29일에야 발표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튿날 ‘조선총독부를 파괴하랴든 폭발탄대의 대검거’로 보도할 수 있었죠. 이 보도로 의열단의 존재가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6월 8일자 3면 ‘밀양 폭탄사건 곽재기 등의 공판’은 의열단 15명의 첫 재판 기사입니다. 1년 가까이 취조와 예심을 거치면서 말 못할 고생을 겪었지만 법정에 선 이성우는 당당한 자세를 허물지 않았고 곽재기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는 여유를 보였죠. 주범으로 지목된 두 사람은 나란히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1명은 징역 7년형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죠. 나머지 2명은 징역 1년 형에 집행유예 2년이었고요.

왼쪽은 1928년 3월 8일 출소한 이성우의 얼굴사진. 20대 초반의 청년의 얼굴이 옥살이 끝에 중년으로 변했다. 오른쪽은 1927년 1월 22일 마포형무소를 나와 가족을 만난 곽재기. 사진 왼쪽부터 양아버지 맏아들 곽재기 어머니.
왼쪽은 1928년 3월 8일 출소한 이성우의 얼굴사진. 20대 초반의 청년의 얼굴이 옥살이 끝에 중년으로 변했다. 오른쪽은 1927년 1월 22일 마포형무소를 나와 가족을 만난 곽재기. 사진 왼쪽부터 양아버지 맏아들 곽재기 어머니.

이성우는 이듬해 청진형무소에서 탈옥을 시도할 만큼 대담했습니다. 4명이 집단 탈옥했으나 이성우는 간수와 싸우다 붙잡혀 2년 형이 추가됐죠. 곧바로 경성형무소로 옮겨져 복막염과 늑막염을 앓으면서 3년 간 고생했고 1년 반은 병감 신세를 졌다고 하죠. 동아일보는 1928년 3월 9일자에 이성우의 출옥 소식을 전합니다. 3년 정도 감형 받아 옥문을 나서던 이성우는 기자에게 “감상이 무엇 있겠습니까. 잘 휴양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했죠.

의열단은 첫 거사에 실패했지만 1920년 9월 박재혁이 일본인 부산경찰서장을 폭살시켰고 같은 해 12월에는 최경학(일명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비록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지만 새로운 의열단원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키로 함'이라는 공약을 실천하면서 몸을 던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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