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의 주문 외우는 소리는 찢어지는 고음으로 올라갔다 다시 졸린 듯 낮은 소리로 변해 후렴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 무당의 춤과 호곡(號哭)은 저 오래된 태곳적의 기이한 느낌을 인간의 의식 속으로 불러들이는 소환의 주문이었다.” 1919년 어느 봄날 서울의 낡은 성곽 밖, 계곡을 낀 언덕의 신당(神堂)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벽안(碧眼)의 자매가 지켜보고 있었다.
1946년 출간된 이 책은 스코틀랜드 애버딘셔 출신인 두 자매 앞에 펼쳐진 일제강점기 한국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동아시아의 국가들 모습을 목판화에 담았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와 1915년부터 남편과 일본 도쿄에서 출판사를 했던 엘스펫 키스 로버트슨 스콧이 주인공이다.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석 달간 한국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을 키스가 그렸고 스콧이 썼다.
서문에서부터 제국주의적 시선을 거두고 낯선 문화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이방인의 따스한 시각이 묻어난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그곳은 깊은 비극에 휩싸여 있었다. … 서울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학생, 어른 등 여러 한국 사람이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등 온갖 처참한 대우를 받은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고대 성직자처럼 가슴속에 불이 활활 타들어 가는 듯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던 때에 한국을 찾은 이들은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에서 듣던 일본 중심적인 한국, 한국인 이야기가 정작 와서 듣고 보니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초록색 장옷을 입은 여자(The green cloak)’. 책과함께 제공“3·1만세운동은 놀라운 발상이었고, 영웅적인 거사였다. 빈손으로 독립을 촉구한 사람들은 보복이 얼마나 심할지 잘 알고 있었음에도 서울에서만 20만 명이 길거리를 메웠고, 한반도 곳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비폭력적 저항을 했다.”
당시 한국인의 각종 풍습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묘사한다.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었는지, 표정은 어떠하고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등이 펼쳐진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며 동양 고전을 이야기하는 두 노인, 엄청난 양의 빨랫감을 들고 냇가에서 빨래하고 다듬이질하는 여인들의 고충 등이 눈앞에 생생하다. “동아시아 어디든 같겠지만, 아무 데서나 침을 뱉는 습관은 문제”라는 솔직한 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낸다.
삽화로 함께 곁들여진 키스의 그림은 시각적 재미를 더한다. 굿하는 무당의 모습이나 사당 풍경 같은 토속신앙을 묘사한 그림은 흔하지 않아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키스는 ‘독립청원서’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했다 2년 형을 살고 출옥한 운양 김윤식의 초상화도 남겼다. 그 한 달여 뒤 김윤식은 숨졌다.
이 책을 옮긴 송영달은 키스의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해 왔다. 미국 이스트캐롤라이나대의 정치학, 행정학 교수였던 그는 우연히 한 고서점에서 키스의 책과 작품을 발견하고 2006년 이를 한국어로 번역해 책으로 펴냈다. 이 초판본에는 키스의 그림 66점이 실렸는데 이번 ‘완전 복원판’에는 키스가 한국을 소재로 그린 작품 85점을 모두 소개했다. 송 교수는 2007년 키스의 조카 집에서 발견한 무명의 연도 미상 초상화가 이순신 장군의 것이라고 추정한다. 검증이 필요하지만 맞는다면 충무공 초상화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국내 학계에서는 충무공의 5대손 이봉상의 초상화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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