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그냥 주저앉을 건가요? 갈 길이 많이 남았잖아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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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권여선 지음/284쪽·1만3500원·문학동네

품 안의 자식으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제 엄마에게 지청구를 하고 눈을 흘기는 본새에 기가 턱 막히는 순간이 있다. 말이 가닿은 줄 알았는데 닿기는커녕 귓바퀴 언저리에서 튕겨 나왔나 보다. 부모 자식 간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말들이 진심을 꿰뚫지 못하고 버려지는지.

소설가 권여선의 신작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은 단절된 관계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말에 천착한 단편들을 모았다. 이들 작품에서 인물들은 ‘측량할 수 없는 거리만이 절박한 실재’로 남아 ‘머나먼 타인처럼’ 느껴진다.(‘희박한 마음’) 그들은 부재하는 엄마(아내)로 인해 반목하는 부녀(‘모르는 영역’)이거나, 언니의 저금과 대출받은 돈을 들고 도망간 엄마 때문에 갈라진 이부(異父) 자매(‘손톱’)이거나,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반신불수 엄마를 위해 직장에서의 부조리함을 참아내는 기간제 교사인 딸(‘너머’)이다.

그 말은 ‘상의 한마디 없이’ 내리꽂히는 그 무엇이어서 ‘상의도 아니고 대화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끼게 된다. 말의 일방통행 속에서 인물들은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뭘, 뭘, 뭘? 뭘? 뭘?’이라며 악을 쓰기도 하지만 결국 ‘대꾸하려다 말았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돼버린다.

하지만 허공에서 부유하는 말들의 배경은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가난과 신분의 부당함이 짓누른다. ‘대출받은 옥탑방 보증금, 이자가 제일 센 그 오백만 원부터 갚아야’ 하는 쇼핑테마파크 점원(‘손톱’)은 청양고추가 들어갔다고 500원 더 비싼 짬뽕을 포기한다. ‘정규 비정규의 경계도 아니고 비정규 내에 추가로 설정된 라인’이라는 ‘새로운 가름선’에 기간제 교사는 ‘이 따위, 이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라며 눈물을 쏟는다.(‘너머’)

저자는 소설가 김애란이 표사(表辭)에서 말하듯 ‘비정해서 공정한 눈’으로 인물들을 훑는다. 희망은 희미할 뿐이다. ‘아직 멀었다’는 말을 ‘바닥을 쳤지만 진흙바닥이었군’이라는 자조로 받아들일지, ‘여기서 주저앉기에는 갈 길이 많이 남았다’는 의지로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아직 멀었다는 말#권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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