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닮은 서핑에 푹… 바닷가서 힐링하라고 축제 만들었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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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서 서핑 영화제 ‘그랑블루 페스티벌’ 개최한 영화감독 이현승

21일 오후 5시 강원 양양군 죽도해변에서 바다 환경보호를 위한 ‘서프보드 플래시몹’에 참가한 서퍼들이 보드를 들고 일렬로 늘어서 있다. 그랑블루 페스티벌 제공
21일 오후 5시 강원 양양군 죽도해변에서 바다 환경보호를 위한 ‘서프보드 플래시몹’에 참가한 서퍼들이 보드를 들고 일렬로 늘어서 있다. 그랑블루 페스티벌 제공
“서핑은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내가 탈 수 없는 파도에 오르려다 고꾸라지고, 좋은 기회를 나도 모르게 놓치기도 해요. 마치 영화나 인생 같죠?”

15년간 집행위원장을 맡아 이끌어 온 미장센 단편영화제를 내려놓은 이현승 영화감독(57)이 서핑에 푹 빠졌다. 그가 만든 서핑 영화제 ‘그랑블루 페스티벌’이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 강원 양양군 죽도해변에서 열렸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21일 만난 이 감독은 구릿빛 피부로 모래사장을 누비고 있었다.

“서핑은 20년 전 하와이에서 처음 배웠습니다. 그 후 잊고 있다가 우연히 사진을 보고 2013년 양양에 왔어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서핑이 인생 같아 빠져들었고, 이곳에 정착하게 됐죠.”

죽도해변은 해안선이 오목해 크기가 아담하고, 수심도 깊지 않아 초보자도 서핑을 즐길 수 있다. 해변 인근에는 횟집 대신 수제버거, 맥주, 타코를 파는 음식점과 서핑용품 대여점이 가득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열린 ‘그랑블루 페스티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현승 감독. 수년 전부터 서핑에 빠진 이 감독의 영화에는 공교롭게도 모두 바다가 나온다. 양양=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열린 ‘그랑블루 페스티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현승 감독. 수년 전부터 서핑에 빠진 이 감독의 영화에는 공교롭게도 모두 바다가 나온다. 양양=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양양 생활 6년 차인 이 감독이 처음 왔을 때 현지 주민들은 그를 낯설어했다.

“먼저 인사하고 맥주도 함께 마시니 ‘영화감독이래’ 하며 조금씩 알아봤어요. 이곳 서퍼들이 도시락이나 커피를 내줘 지난해 첫 영화제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랑블루 페스티벌은 매일 아침 쓰레기를 줍는 ‘비치 클린’으로 시작했다. 이 감독에 따르면 이곳 서핑 가게 상인들은 평소에도 아침마다 해변 청소를 한다. 파도를 선물하는 자연을 존중하는 의미다.

“2020년 올림픽에 서핑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을 때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서핑은 경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런 취지를 살려 그랑블루 페스티벌도 ‘물, 즐거움을 품다’를 주제로 바다와 환경보호에 관한 영화를 상영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부터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섬을 그린 ‘키리바시의 방주’, 시인 네루다와 어부의 아들 마리오의 우정을 그린 ‘일 포스티노’까지. 아일랜드 서부 라힌치에서의 서핑을 그린 다큐멘터리 ‘비트윈 랜드 앤드 더 시’는 국내 첫 상영작이었다. 21일 오후 8시부터 시작한 영화 상영은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이어졌다. 서퍼들이 해변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면 기업 코웨이가 바다환경보호기금을 적립하는 ‘서프보드 플래시몹’도 열렸다.

‘그랑블루 페스티벌’을 찾은 배우 전도연(왼쪽 사진)과 이정재. 그랑블루 페스티벌 제공
‘그랑블루 페스티벌’을 찾은 배우 전도연(왼쪽 사진)과 이정재. 그랑블루 페스티벌 제공
배우 전도연 오광록 박호산 이천희와 이준익 방은진 한지승 봉만대 감독 등도 찾아와 함께 어울렸다. 전도연은 가족과 함께 바다 수영을 하고 이준익 감독은 해먹에 누워 여유를 즐겼다. 지역 주민들은 영화인들이 온 줄 몰랐다가 뒤늦게 “저 배우도 왔어?” 하며 놀랐다. 이 감독은 “영화인들이 스트레스가 많다는 걸 알기에 편히 와서 힐링하길 바랐다”며 “그래서 ‘페스티벌’ 이름에 ‘필름’이란 말을 넣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19일부터 22일까지 강원 양양군 죽도해변에서 열린 ‘그랑블루 페스티벌’은 바다 바로 옆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를 상영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21일에는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밤샘 상영도 진행했다. 그랑블루 페스티벌 제공
19일부터 22일까지 강원 양양군 죽도해변에서 열린 ‘그랑블루 페스티벌’은 바다 바로 옆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를 상영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21일에는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밤샘 상영도 진행했다. 그랑블루 페스티벌 제공
가장 화제를 모은 건 바닷가 스크린에서 깜짝 상영한 ‘시월애’였다. 2000년 개봉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건축, 감각적 화면은 물론이고 배우 이정재와 전지현의 앳된 모습에 300여 명 관객이 즐거워했다. 이정재도 참석해 “오래전 영화여서 다시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고 인사한 뒤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디지털 리마스터링(보정) 작업을 거친 ‘시월애’는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감각적 표현에 능숙한 이 감독은 최근 한국 영화가 액션이나 스릴러에 쏠려 아쉽다고 털어놨다.

“최근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분노, 불안,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회를 반영해 영화도 복수나 울분이 많았죠. 하지만 고요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리틀 포레스트’ 같은 영화를 많은 관객이 찾았다고 하니 희망이 보입니다.”

이제 ‘강원도민’인 그는 최근 제작사 ‘스튜디오 블루’를 차렸다.

“젊은 사람들이 와서 정착하도록 일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국내 최초 면 단위 제작사일 겁니다.”

다음 프로젝트에 대해 묻자 그는 생계를 위해 다양한 영상물을 주로 제작할 것이라면서도 한마디 덧붙였다.

“또 모르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처럼 이현승표 ‘죽도 서핑 다이어리’가 나올지도요. 하하.”

양양=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그랑블루 페스티벌#서핑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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