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기록 창고 ‘장서각’ 100주년 맞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0일 03시 00분


1918년 내걸린 장서각 현판. 고종이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918년 내걸린 장서각 현판. 고종이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 왕실 서고로 시작해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속하며 한국학 자료의 보고(寶庫)로 자리 잡은 장서각이 ‘藏書閣(장서각)’이라는 현판을 내건 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장서각의 역사에는 격동의 현대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윤진영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에 따르면 장서각의 기원은 고종이 건립하려 했던 대한제국 황실도서관이다. 고종은 홍문관, 집옥재 등에 흩어져 있던 서적을 1908년 인수관(仁壽館)으로 옮기고, 이듬해 ‘제실(帝室)도서’라는 이름으로 황실도서관을 세우려 했지만 경술국치로 끝내 이를 이루지 못했다.

왕실 도서는 일제강점기에도 꿋꿋이 보존됐다. 1911년 6월 ‘이왕직도서고’가 설립돼 적상산사고본(赤裳山史庫本) 조선왕조실록 등을 인수하며 왕실서고의 명맥이 이어졌다. 1915년 창경궁의 명정전 뒤편에 4층 서고건물을 지었고, 1918년에야 장서각 현판이 내걸렸다. 현판 글씨는 고종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창경궁에 건립된 장서각의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915년 창경궁에 건립된 장서각의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광복과 6·25전쟁으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장서각 도서는 광복 뒤 미 군정하에서 구(舊) 왕궁사무청이 관리를 맡았다. 6·25전쟁 당시 적상산사고본 실록이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반출됐고, 적지 않은 전적(典籍)이 부산 피란 중 화재로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장서각은 1950년 낙선재의 한글소설류, 1964년 칠궁(七宮·임금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신 사당) 소장 자료, 1969년 봉모당(奉謨堂·정조가 역대 임금의 어필 등을 보관토록 한 곳)과 보각(譜閣)의 자료를 인수하면서 명실상부한 왕실도서 자료관으로서 위상을 갖게 됐다. 윤진영 실장은 “오늘날 장서각은 왕실 고문서 5300여 점을 비롯해 국보 3점, 보물 29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2종 등 약 16만 책의 고문헌을 소장하고 있다”며 “조선 건국까지 멀게는 600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기록문화의 정수”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장서각#왕실도서 자료관#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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