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폭도도 순교자도 아닌 용산4구역 주민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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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 혜연아, 행복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날이 있을는지 모르겠다.―꽃 피는 용산(김재호·서해문집·2013년)》

1984년 김재호 씨(62)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10평 남짓한 금은방을 열었다. 소싯적 종로통에서 배운 세공 기술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10년쯤 지난 뒤엔 가게 손님과 연이 닿아 가정을 꾸렸다. 넉넉지 않은 수입에 집도, 점포도 빌려 써야 했지만 김 씨 가족의 생활은 소소하게 행복했다. 이웃들은 딸 혜연이 손을 잡고 골목길을 오르내리던 그를 ‘딸 바보’라고 불렀다.

김 씨가 한강대로 변 4층 건물 옥상에 화염병을 들고 올라간 건 2009년 1월 19일이었다. 재개발사업으로 집들이 헐리게 되자 그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세입자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농성에 들어갔다. 임대주택과 임시상가를 마련해 달라는 게 그들의 요구였다.

참사는 이튿날 새벽 벌어졌다. 건물 주변에 모인 경찰 1600여 명은 살수차를 앞세워 철거민들을 해산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컨테이너 망루 속 인화물질에 불이 붙었고, 주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김 씨 역시 부상해 경찰서로 연행됐다.

유례없는 도심 참사가 일어난 다음 날, 세상이 희생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잔인했다. 보수 진영은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단죄를 촉구했다. 반대편에선 ‘정부의 폭력에 맞선 순교자’라는 식으로 치켜세웠다. “장사를 계속하게 해 달라”며 망루에 올랐던 소시민들이 어느새 거대한 이념 다툼의 맨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용산의 불행을 이용한 이런 편 가르기는 9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한 듯하다.

하지만 ‘이들이 선(善)이냐, 악(惡)이냐’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며 비인간적이다. 김 씨는 폭력을 쓴 데 대한 죗값을 징역형으로 이미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 400여 통의 그림편지를 그려 딸에게 보냈다. ‘꽃 피는 용산’은 이 편지들을 엮은 만화책이다. 여기에 그려진 김 씨 가족은 폭도도 순교자도 아닌, 평범한 이웃의 모습이다.

올봄엔 용산4구역 주민들과 희생자 6명의 가정에도 새잎이 돋길 기도한다.

천호성 기자 thousand@donga.com
#책#꽃 피는 용산#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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