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화제]눈앞엔 환상, 다리는 천근… 22시간 ‘죽음의 레이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3일 03시 00분


호주 울트라트레일 100km 뛰어 보니

호주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100km가량 떨어진 세계자연유산인 블루마운틴 산악지대 시닉월드에서 울트라 트레일러닝 100km 부문에 도전하는 선수들이 일출을 전후해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카툼바=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호주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100km가량 떨어진 세계자연유산인 블루마운틴 산악지대 시닉월드에서 울트라 트레일러닝 100km 부문에 도전하는 선수들이 일출을 전후해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카툼바=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주민들이 딸랑거리는 워낭을 열심히 흔들며 100km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 선수들의 기운을 북돋아줬다. 휴일을 맞아 별장에서 쉬고 있던 휴양객도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듯한 파란 눈의 어린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하이 파이브’를 청했다. 대회 자원봉사자는 어두컴컴한 숲 속에 홀로 있으면서도 띄엄띄엄 지나는 선수들의 건강상태를 먼저 챙겼다. 선수 가족들은 중간에 있는 쉼터에서 열정적인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수와 가족, 자원봉사자 모두가 축제처럼 대회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지난달 20일 오전 6시 20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카툼바의 시닉월드. 호주울트라트레일(UTA) 100km 부문에 도전한 선두그룹 선수들이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남자 941명, 여자 339명 등 1280명의 선수가 7개 그룹으로 나뉘어 순차적으로 출발했다. 호주의 대표적인 국립공원이자 세계자연유산인 블루마운틴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레이스에 돌입한 것이다. 30여 개국에서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에서는 기자를 포함해 한국에서 날아간 9명, 재외동포 2명 등 11명이 도전장을 냈다.

세계자연유산 비경의 코스

대회 전날 소나기가 쏟아진 가운데 출발 직전까지 비가 내리는 날씨가 이어졌다. 체감온도는 10도 이하로 뚝 떨어졌다. 완주에 대한 부담과 함께 날씨마저 악조건이어서 긴장감이 더욱 컸다. 여명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해가 뜨면서 비는 잦아들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협곡 레이스에 접어들면서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내린 비 덕분에 수량이 풍부해진 폭포수를 따라 내리막이 하염없이 이어졌다. 지그재그 계단은 물론이고 직각 수준의 절벽을 내려가기도 했다.

오르막내리막을 반복할 즈음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블루마운틴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늘 푸른 나무인 유칼립투스(Eucalyptus)에 태양빛이 반사되면서 계곡과 숲에 파란빛이 감돌았다. 유칼립투스 세계 최대 자생 군락지인 블루마운틴의 이름이 붙은 이유다. 선명한 파란빛은 아니었지만 구름 사이로 보이는 진한 파란 하늘과는 달리 은은한 빛을 띠었다. 유칼립투스는 수십 m에 이를 정도로 하늘 높이 시원스레 솟았고, 거무튀튀한 나무껍질을 벗고 우윳빛 속살을 드러냈다. 성인 4명이 안아도 손이 닿지 않을 만큼 거대한 유칼립투스도 군데군데 보였다.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주식으로 한다는 코알라는 보이지 않았다. 유칼립투스 잎을 비벼 보니 한라산 특산수종인 구상나무와 비슷한 상큼한 향기가 났다. 호주에서는 유칼립투스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을 일상에서 사용한다. 살균과 해충 퇴치, 공기청정 등으로 사용하는데 국내에서도 수입해서 판매한다. 해발 1000m가량의 고지에 서자 적갈색의 사암(砂巖)지대 절벽과 함께 밀림이 끝없이 펼쳐졌다.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숲 어딘가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울레미 소나무(Wollemia nobilis)’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살짝 흥분됐다.

고요한 숲의 정적을 깨는 이는 은방울 굴러가듯 낭랑하거나, 때론 날카롭게 울부짖는 새들이었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리다. 마치 회초리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듯 강한 소리를 내는 동부채찍새(Eastern Whipbird) 울음은 신기하기만 했다. 공룡시대 익룡의 소리인 듯한 상상을 하게 하는 코카투(유황앵무)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요란했다. 길가에서는 뱅크시아계통의 식물에 노란 꽃이 피었다. 꿀샘이 풍부해 다양한 종류의 새를 블루마운틴으로 불러 모은다고 했다.

한계를 극복하는 도전

호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인 UTA 100km 부문에 참가해 완주한 본보 임재영 기자.
호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인 UTA 100km 부문에 참가해 완주한 본보 임재영 기자.
레이스가 중반을 지나 관광지로 유명한 바위산인 ‘세자매봉’ 인근을 지났지만 어둠이 밀려들어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70km를 넘어서면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만 했다. 얼굴을 꼬집고 허벅지를 짓누르며 참았다. 1시간 정도를 견디자 졸음은 어느 정도 물러갔지만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마지막 체크포인트(CP·통과시간을 측정하고 음료와 간식을 제공하는 장소)를 지나면서 완주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10km가량을 남기고 급경사 내리막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내려간 만큼 오르막을 올라야 결승선이었다. ‘끝까지 완주하려면 체력을 안배하고 성급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고비는 ‘퍼버 계단(Furber step)’으로 불리는 가파른 오르막 지역. 1908년 당시 계단을 조성한 토지조사원의 이름을 딴 곳으로 높이 300m, 길이 1km에 921개 계단이 놓여 있는 구간이다. 오르고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겁기 그지없었다. 중도 포기의 창피함, 완주 후 마실 시원한 맥주 등을 떠올리며 견뎌낸 끝에 결국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록은 21시간 59분28초. 제한시간인 28시간 이내 완주에 성공했다.

이 대회는 호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트레일러닝대회로 국제트레일러닝협회(IRTA)가 인증한 울트라트레일월드투어(UTWT) 시리즈 대회다. 2008년 참가자 174명으로 처음 대회를 치른 이후 올해로 10회를 맞았다. 코스의 누적 해발고도는 4156m로 한라산 성판악탐방안내소를 출발해 정상을 3∼4회 왕복해야 하는 난도다. 이번 대회 1위는 8시간52분을 기록한 미국인 팀 톨렙슨이 차지했다. 100km 부문 외에도 50km, 22km 등의 레이스가 펼쳐졌다. 전체 대회 참가자는 5000여 명에 이른다. 이번 대회를 위해 500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으며 식수는 물론이고 콜라 1000L, 수박 1200kg 등이 쓰였다.

100km 참가자 1280명 가운데 완주는 83.2%인 1065명이다. 한국인(동포 포함) 11명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이진혁 씨(32)는 “해외 대회 참가는 처음이라 두려움과 긴장감이 상당했고 레이스 도중에 포기하고픈 생각도 들었지만 고통을 이겨냈다”며 “한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 만큼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닥치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12시간19분 만에 완주한 신순철 씨 “산, 숲, 바람과 함께 달리는게 트레일러닝 매력”▼


“쉬는 날 한꺼번에 여러 끼를 몰아 먹지 않듯이 운동도 매일 꾸준히 자신의 능력에 맞춰서 해야 합니다.”

단신이지만 언뜻 보기에도 다부진 몸매의 신순철 씨(51·사진)는 100km 울트라 트레일러닝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아마추어들에게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강도를 높여 나가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조언을 했다. 신 씨는 호주 시민권자로 이번 대회 100km에 참가해 62위인 12시간19분25초를 기록했다.

신 씨는 정보기술(IT) 전문가로 기업에 다니다가 경영학 공부를 하기 위해 호주로 건너온 뒤 1996년 그대로 눌러앉았다. 2002년부터는 한국인들의 호주 정착을 돕는 이민법무사 활동을 하고 있다. 테니스와 수영 등을 즐기다가 호주에서 트레일러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13년 호주울트라트레일 100km 대회에 처음 도전한 뒤 매년 참가해왔다.

신 씨는 트레일러닝을 하면서 제주에서 열린 국제트레일러닝대회 100km, 전주순례길 100km 레이스 등에 참가했다. 그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트레일러닝을 시작했다”며 “산과 숲 바람과 함께 달리며 자연의 일부가 되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호주와 유럽 등지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전 7시에 시작하는 파크런(parkrun) 대회가 있다. 공원 5km 달리기로 자원봉사자에 의해 경기가 진행된다. 그는 “한국에서도 공원과 체육관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시스템이 잘 갖춰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트레일러닝 참가하려면▼

방수재킷-나침반-랜턴 등 필수 장비 없으면 실격


포장길을 달리는 일반 마라톤과 달리 트레일러닝(trail running)은 산과 들 계곡 사막 밀림 등 비포장 길을 달리는 아웃도어 스포츠다.

유럽에서는 새로운 트레일러닝 대회가 속속 생겨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최근 아시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등산로나 트레일을 기반으로 코스가 만들어진다.

모험적이지만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도로 마라톤과 달리 장비에 대한 점검이 까다롭다. 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아예 참가 등록도 할 수 없으며 레이스 도중 장비 점검에서 필수 품목이 없으면 감점을 받거나 실격 처리된다.

대회마다 조금 다르지만 방수 및 방풍 재킷, 비상식량, 압박붕대, 호루라기, 생존담요, 헤드랜턴, 식수, 나침반, 휴대전화, 모자 또는 버프 등은 필수 품목이다.

이번 호주 100km 대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야광조끼가 필수 품목에 포함됐다. 아스팔트 도로와 밀림 속에서 선수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주최 측이 정한 것이다.

이 밖에도 아마추어 선수들은 야간에 레이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분의 랜턴 배터리, 방한 장비 등을 갖춰야 한다.

카툼바=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호주 울트라트레일#카툼바#트레일러닝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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