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바람피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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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올여름 폭염의 기세가 그리도 등등하더니 아침저녁으로 건들바람이 분다. 건들팔월도 거의 다 갔다.

 바람은 참 이름이 많다. 방향에 따라 부르는 이름만도 수두룩하다. 샛바람(동풍), 갈바람(서풍), 마파람(남풍), 된바람(북풍), 된새바람(동북풍), 된하늬(서북풍), 된마파람(동남풍) 등등. 그런데 이 바람들은 뱃사람들의 입길에서 나왔다. 바람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고맙고도 두려운 존재였으니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불어오는 장소에 따라서도 이름이 여럿이다. 뒤쪽에서 불어오는 꽁무니바람, 문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고 할 때의 문바람, 바둑에서 상대방의 대마를 쫓으며 내는 손바람, 바깥세상의 기운이나 흐름을 뜻하는 바깥바람이 그렇다.

 바람의 세계에도 멋진 낱말이 많다. 바람꽃은 큰 바람이 일 때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뽀얀 기운을 일컫는다. 바람기는 바람이 불어올 듯한 기운인데, 이성과 함부로 사귀거나 관계를 맺는 걸 뜻한다. 바람씨는 바람이 불어오는 모양을 말한다. 또 있다. 비는 내리지 않고 심하게 부는 바람은 강바람, 살을 에는 듯 매섭게 부는 바람은 고추바람, 방향이 없이 이리저리 마구 부는 바람은 왜바람이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란 표현도 재미있다. 게는 남풍이 불면 재빨리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여기에 빗대 음식을 매우 빨리 먹는 걸 이른다.

 고약한 바람도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우기는 바람 말이다. 근데 이 바람은 피는 걸까, 피우는 걸까.

 먼저 ‘피다’를 보자. ‘꽃이 피다’는 자연스럽지만 ‘꽃을 피다’는 말이 되지 않는다. 피다는 동작이나 작용이 주어에만 미치는 자동사로, 목적어를 취할 수 없다. 그럼, 타동사 ‘피우다’는 어떤가. ‘소란을 피우다’ ‘거드름을 피우다’에서 보듯 자연스럽다. 즉 ‘피우다’ 앞에는 목적어가 있어야 하니 ‘바람을 피우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담배 한 대 피고 올게”처럼 쓰는 이도 많은데, 이 역시 “피우고 올게”라고 해야 한다.

  ‘사람도 늦바람이 무섭다.’ 늙어서 바람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음을 나타낸 속담이다. 그런가 하면 ‘바람피우다’는 한 낱말로 사전에 올라 있다.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의 역사가 꽤나 오래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나 할까.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바람#바람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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