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극계에서 낯선 시극 운동을 10년 넘게 펼쳐온 김경주 씨는 “시적인 침묵과 행간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에 대한 짝사랑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
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때는 14세기 말 조선, 가뭄이 계속되는 여름이다. 서울 사대문 축성을 마쳐야 하는 시기는 다가오고 있는데 인부들은 기근과 역병으로 죽어나가는 상황이다. 흉흉한 소문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나날들을 보낸다. ‘나비잠’(호미)은 이런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다. 김경주 씨(40)의 시극(詩劇) 대본이다.
20일 만난 김 씨는 “시극 운동은 모국어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시극이란 연극의 대사가 시의 형태로 쓰인 희곡을 말한다. 시인이면서 연극에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그는 10년 넘게 시극 운동을 해 왔다. ‘나비잠’은 2013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공연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내년 가을 미국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 공연도 앞두고 있다. 서울 공연 때 연출을 맡았던 미국의 연출가 시어도라 스키피타레스와의 인연으로 성사됐다. ‘나비잠’이 한국어판과 영문판으로 함께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나비잠’은 희곡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음에도 올해에야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공식 등단한 뒤 그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희곡 단행본이다.
‘어머니, 어머니. 입 속에서 꽃이 피기 시작해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 입 속에서 핀 꽃을 따 먹고 노래해요. … 외로우면, 엄마, 나는 엄마 눈을 만져 봐요. 눈을 감고 엄마 눈을 가만히 만지면, 엄마의 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나비잠’은 이렇듯 시로 여겨질 만한 대사가 이어진다. 두툼한 한 권의 시집으로 볼 만하다. “촘촘한 스토리텔링이 강조되는 분위기에서 시극의 설 자리가 좁아지는 현상이 안타깝다. 친절하게 모든 이야기들을 설명해주는 무대에 밀려서다.” 국내 연극계에선 낯선 시극 창작에 매진해온 이유를 이렇게 들려줬다.
14세기의 이야기가 21세기의 독자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지 묻자 김 씨는 “자면서도 전광판과 휴대전화를 켜놓는 삶, 현재의 서울은 밤이 되어도 잠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루머와 악성 댓글과 음모론에 휩싸여 무엇을 잃어버리는지도 모른 채 감각적으로 마비돼 살아가고 있다. 현대의 인간이 잠을 잃어가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여기에 빗대 어수선한 소문으로 잠 들지 못하는 조선의 날들이라는 상황을 설정했다.” 김 씨는 소설의 주인공 ‘달래’의 자장가가 마을 사람들을 달래는 데 대해 “모국어에 가까운 시적인 언어로 이뤄진 자장가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면서 “모성의 언어를 찾아가는 리듬을 전달하는 시극을 통해 현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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