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광표]수덕여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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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오피니언팀장
이광표 오피니언팀장
예산 수덕사에 종종 간다. 수덕사의 매력은 단연 대웅전(국보 49호, 고려 1308년)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맞배지붕의 간결함과 우직함. 선(禪)의 사찰에 걸맞은 모습이다. 요즘 수덕사에 가면 대웅전 못지않게 일주문 왼편에 있는 수덕여관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수덕여관을 둘러볼 때마다 이런 얘기를 듣는다. “어떻게 절 앞에 여관이 있어요?” “예전엔 출가하려는 사람들이 여기 와서 잠도 자고 그랬단다.” “여기가 바로 고암 이응노 화백이 살았던 곳이야. 저기 저게 문자추상 석각(石刻)이고….”

수덕여관 하면 흔히 고암 이응노를 떠올린다. 이응노가 1945년 이 여관을 매입했고,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이곳에서 요양을 했으며 그때 문자추상 석각을 남겼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응노보다 더 절절한 사연으로 얽혀 있는 사람이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다.

나혜석이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7년 말 수덕사로 일엽 스님을 찾아가면서. 당시는 나혜석이 ‘이혼고백서’ 발표 등으로 인해 가부장적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심신이 피폐해질 때였다. 나혜석과 동갑내기 일엽은 신여성의 선두에서 여성해방과 자유연애를 외쳤으나 1933년 출가해 수덕사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나혜석은 수덕사에서 출가하고 싶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44년까지 수덕여관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그림도 그렸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도회로 나갔으나 전남편 김우영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만 했다. 간혹 서울의 오빠 집에 들렀으나 돌아온 건 오빠의 냉대였다. 나혜석은 비극의 바닥으로 빠져들었다. 동공은 풀어지고, 손은 떨렸다. 뇌졸중이 심해 잘 걷지도 못했다. 수덕여관을 떠나 이곳저곳 전전하다 1948년 서울시립남부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다.

최근 나혜석 평전을 읽었다. 선구적이었기에 오히려 비극과 파탄에 이른 나혜석의 삶. 책장을 넘길수록 애처로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은 이렇게 평했다.

“조선사회의 도덕적 형벌은 이토록 가혹하였다. 이 땅의 근대 문화와 새로운 사상에 그토록 많은 공헌을 남긴 선각의 여성이 단지 한때의 과오로 인해 그처럼 가혹한 비극의 심연에 처넣어져 모진 종말의 길을 가게 될 때, 지난날 그녀가 항시 사랑했던 조국 조선은 일제로부터 해방과 독립이 이루어졌다. 3·1운동에도 가담했고 만주에선 압록강을 넘나들던 항일 독립투사들의 내왕을 도왔던 나혜석이 그 감격을 어디서 혼자라도 외치기나 했을까.”

지난해 말 나혜석의 막내며느리가 나혜석의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을 고향인 수원시(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 기증했다. 막내아들인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의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생전에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막내아들이었다. 그 기증은 어쩌면 나혜석과 막내아들, 나혜석과 세상의 화해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부터 나혜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그에게 드리운 편견을 걷어내려는 움직임도 많다.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를 조성했고 집터도 단장해 놓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 수덕여관이다. 이곳은 나혜석의 비극적인 흔적 가운데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수덕여관엔 나혜석에 관한 기록이나 기념물 하나 없다. 28일은 나혜석 탄생 120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혜석의 관점에서 수덕여관에 좀 더 주목해야 할 때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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