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낙인찍힌 극작가의 매카시즘 광풍서 살아남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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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럼보’

‘트럼보’에서 다룬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까지는 미국 할리우드의 암흑기로 불린다. 수많은 작가와 감독, 제작자들이 공산주의와 관련 있다는 혐의를 받으며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트럼보’에서 다룬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까지는 미국 할리우드의 암흑기로 불린다. 수많은 작가와 감독, 제작자들이 공산주의와 관련 있다는 혐의를 받으며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7일 개봉한 영화 ‘트럼보’(15세 이상)를 재미있게 보기 위해선 배경 지식을 조금 알 필요가 있다. 이름만 들어서는 낯선 주인공 돌턴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턴)는 할리우드 고전 ‘로마의 휴일’ ‘스파르타쿠스’ 등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로,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존재다. 할리우드 황금기와 암흑기를 동시에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트럼보가 이미 작가로 성공한 뒤인 1943년에서 출발한다. 파시즘에 반대하며 미국 공산당에 가입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미국이 소련과의 냉전에 돌입하면서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해 내기 위한 의회 위원회에 소환된 그는 대형 스튜디오들이 절대 기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작가와 감독들의 블랙리스트 즉, ‘할리우드 10’에 이름을 올려 아무것도 쓸 수도, 발표할 수도 없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트럼보는 ‘빨갱이’라는 낙인찍기에 굴복하는 대신 기발한 싸움에 나선다. 바로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다. 1947년부터 1960년까지 트럼보가 사용한 가명이 10개가 넘고, 그사이 그가 남의 이름을 빌렸거나 가명으로 쓴 작품(‘로마의 휴일’ ‘브레이브 원’)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두 차례나 각본상을 받는다.

자칫 흔한 인간 승리 드라마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오스틴 파워’ 시리즈를 연출한 제이 로치 감독은 유머 감각을 발휘해 영화를 산뜻하게 연출해냈다. 영화는 인물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트럼보는 물론이고 극렬 반공주의자였던 칼럼니스트 헤다 호퍼(헬렌 미렌)를 비롯한 트럼보의 적수들에게도 골고루 시선을 둔다. 삼류 제작사에 가명으로 쓴 시나리오를 팔아넘기는 트럼보와, 그를 돕는 사람들,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반공주의자들의 모습은 소동극에 가깝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잇달아 이 시기를 다룬 작품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스파이 브릿지’는 매카시즘 광풍이 절정에 달했던 1957년 소련 스파이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의 이야기다. 3월 24일 개봉한 ‘헤일, 시저!’는 1948년을 배경으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해고당했던 작가들이 당대 최고의 배우를 납치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

다만 매카시즘의 정점을 그린 ‘스파이 브릿지’나 배경 설명이 다소 부족한 ‘헤일, 시저!’와 달리 ‘트럼보’는 두 영화를 시기적으로 관통하며 시대와 인물을 골고루 보여준다. 특히 그 시대에 피해자로 생존해야 했던 인물, 나아가 그의 가족이 어떻게 굳은살이 박일 지경까지 상처 입는지를 찬찬히 담아내며, 이런 일이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강렬한 예감을 안긴다. ★★★(별 5개 만점)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영화#트럼보#개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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