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일 아침이 당연히 올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스무 살 무렵의 지은이도 마찬가지였다. 목의 염증 때문에 병원을 찾아갔다가 의사의 권유로 신경과 상담을 받지만 뇌전증(간질)이라는 말을 듣고 발끈해 뛰쳐나온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신이 병원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뇌전증의 증상 중 하나는 단기기억상실. 휴가지에서 남자친구에게 느닷없이 소리치며 발작을 일으키고는 곧 그 사실도 잊는다. “느닷없이 닥친 병이니 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바람은 어긋난다. 여러 검사 끝에 의사들은 뇌 속 작은 종양을 발견하고 수술을 권한다.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선뜻 인정하기 어려웠던 저자는 “내게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그림을 그렸다. 응시하기 괴로운 이미지들이다. 두 형상으로 나뉘어 겹쳐 보이는 행인들, 뻥 뚫린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손으로 더듬는 자아 밖의 자아. 그 ‘기록’을 뼈대로 삼아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투병기를 가족들에게 듣고 모아서 만화 형식으로 전개했다. 자기 연민을 절제한 덕분에 다양한 각도로 풍성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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