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바쁜 연말연시였다. 회사에서는 2015년 업무를 마무리하고, 새해 계획을 세우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인사를 전해야 하는 지인과의 약속도 이어졌다. 게다가 이번에는 미루고 미뤘던 ‘이사’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한 뒤 신혼집과 직장의 거리가 멀었지만 이사를 미뤄 놓고 있던 참이었다. 연말연시에 회사에서 주어지는 휴가를 이용하면, 짐 정리를 할 시간이 충분할 것 같아 급히 날짜를 잡았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지만 7년이나 살았던 집을 떠나야 하는 마음에 섭섭함이 앞섰다.
대학생 시절 본가를 떠났지만, 기숙사에 살든 자취를 하든 항상 룸메이트와 함께했다. 직장을 다니며 처음 ‘내 공간’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7년을 생활했다. 그 시간 속에서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가족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웃음 짓는 날도 많았고,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린 날도 있었다. 내가 가진 첫 공간은 내 이야기가 가득한 일기장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새로운 만남을 위해 아쉬운 마음을 넣어두기로 했다. 집을 내놓고, 이사 날짜를 정했다. 옷가지나 책이 많으니 이것들만 제대로 정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정리해야 할 물건이 너무 많았다.
소중한 것들부터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책장을 넘어 침대 밑 공간까지 점령한 책에 손을 댔다. 정리를 시작했지만, 포기할 책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몇 년간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은 책이 태반이었으나 언젠가는 다시 읽을 것 같은 책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눈물을 머금고 버릴 책을 분류했다. 책장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중고 책방에 팔 수도 없는 만화 전집이 제일 먼저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보지 않은 책도 정리했다. 겨우 책장에 들어갈 만큼만 책을 남기고 나니 신발장에 가득한 신발이 내 손길을 기다렸다.
‘네 발이 지네 발이냐’라고 핀잔을 들을 만큼 신발을 좋아하다 보니 신발장 안도 꽉 차 있었다. 여기서는 최근에 발이 피곤해 신지 못하는 하이힐이 정리대상 1호였다. 몇 번 신지 않은 것은 새 주인에게 보내주기로 하고, 고이 챙겨두었다. 앞코가 닳도록 즐겨 신은 신발에도 아쉽지만 ‘안녕’을 전했다.
유행은 돌고 돈다며 처리를 거부했던 옷에 정리의 손길을 뻗쳤다. 아직도 남아있는 대학동아리 티셔츠와 낡은 옷은 의류 수거함으로 보내고, 아직 입을 만한 옷은 필요한 사람에게 전했다. 때가 벗겨지지 않는 낡은 양은냄비와 회전은 안 되지만 꽤 쓸 만한 오래된 선풍기에도 이별을 고했다. 1박 2일을 꼬박 고생하고 나서야 버릴 물건 정리가 끝이 났다.
아끼던 물건을 처분해야 해 이사를 준비할 때는 서글픈 마음이 컸는데, 막상 짐을 다 정리하고 집을 떠나올 때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채우려면 버리는 것이 먼저인데 오랫동안 그것을 잊어버리고 지냈다.
작년은 버리지 못해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이 유난히 많은 한 해였다.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친한 친구를 섭섭하게 했다. 가득 찬 오만으로 직장 동료에게 상처를 입혔다. 잘 지내던 관계가 틀어질 때마다 처음에는 문제를 상대방에게서 찾았다. 타인의 잘못으로 내가 상처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내 욕심으로 가까운 사람이 상처를 받았음을 알게 됐다.
과거에는 가진 것이 없다 보니 버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몇 가지 움켜쥔 것들을 버리지 못해 계속 문제가 생겼다. 필요 없는 인간관계까지 챙기느라 정작 소중한 사람에게는 소홀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쌓인 까칠함을 훈장인 양 내보이며, 주변을 불편하게 했다. 최근 겪은 여러 문제는 나를 꽉 채운 불필요한 것들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생활이든 마음이든 버리지 않고서 좋은 것들을 새로 채워 넣기란 쉽지 않다. 올해부터는 쌓아두기보다는 버리는 쪽을 과감히 택할 것이다. 먼저 회사 책상의 잡동사니부터 정리할 것이다. 필요할 때만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 쌓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쓰겠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미움과 질투, 원망을 적립하는 횟수를 줄여보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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