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체는 내 작품이자 협업자”

  • 동아일보

‘그림 서체’전 연 조규형 디자이너

관람객 참여 작품 ‘사용자가 직접 만드는 한글 그림서체’. 자판의 아무 키나 세 개를 누르고 마지막 키를 반복해서 누르면 서체가 바뀐다. 모니터 3개의 결과가 스크린 하나에 합쳐지는 퍼포먼스 작품이다. 대림미술관 제공
관람객 참여 작품 ‘사용자가 직접 만드는 한글 그림서체’. 자판의 아무 키나 세 개를 누르고 마지막 키를 반복해서 누르면 서체가 바뀐다. 모니터 3개의 결과가 스크린 하나에 합쳐지는 퍼포먼스 작품이다. 대림미술관 제공
“아침에 눈을 떠 오늘도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것을 보니 더없이 고맙고 행복해요. 화단에 이끼가 많이 자랐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음을 알려주네요.”

10월 4일까지 서울 용산구 대림미술관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열리는 그래픽디자이너 조규형 씨(40·사진)의 개인전 ‘그림 서체’에 걸린 작품 ‘러브레터’(2012년)의 내용이다. 하지만 작품 앞에서는 누구도 선뜻 내용을 알아챌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건 각양각색의 꽃으로 뒤덮인 커다란 실크스크린 프린트뿐. 이 이미지는 누군가가 배우자에게 보낸 러브레터를 조 씨가 창안한 ‘꽃그림 서체’로 변환한 결과물이다.

그저 예쁘고 깔끔하게 기존 활자 모양을 다듬어낸 디자인이 아니다. 이번에 조 씨가 선보인 메인 작품은 새 한글 서체 100종이다. 전시실 복판에 100가지 서체 디자인의 원리와 요체를 알려주는 책자를 매달아 놓았다.

‘반듯한’ ‘수상한’ 같은 서체는 생김을 고스란히 반영한 이름을 가졌다. ‘제자원리’라는 서체는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를 설명하는 발음기관의 단면도를 자모 요소로 쓴다. ‘엑스의 살인’이라는 제목의 서체는 뭘까. 자모의 형태가 구성한 공간에 캐릭터와 짤막한 상황을 부여했다. 누군가가 살해당하고, 범인이 도주하고, 탐정이 그 뒤를 쫓는다. 글자 조합에 따라 그 캐릭터와 상황이 재조합돼 새로운 이야기를 형성한다.

“숨, 돌, 풀 등 의식 없는 존재와의 협업 프로젝트를 2009년부터 진행해왔다. 서체디자인은 그 한 갈래다. 디자인한 서체가 글을 무대 삼아 협업자로서 작품을 조직한다. 거기에 색채와 구성 조율을 더하는 게 내 역할이다.”

모든 서체는 명확한 구성원리와 패턴을 갖췄다. 조 씨는 자신이 사용하는 컴퓨터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에 고안한 서체를 적용해 뒀다. 자판으로 글을 쓴 뒤 해당 서체를 적용하면 처음 봐서는 언뜻 알아보기 어려운 ‘글 이미지’가 나타난다. 거기에 색을 입혀 출력하는 것. 그림 같지만 분명 글이기도 한 이미지다.

“한 작가에게는 그가 쓴 소설에서 발췌한 문장을 기하학적 형태의 서체로 전환한 이미지를 수놓은 스카프를 만들어 선물했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입고 다닐 수 있게 된 거다. 스웨덴 유학 시절 지도교수가 건넨 사별한 남편의 마지막 메모는 꽃그림 서체로 찍어냈다. 지금 교수의 침실에 벽지로 붙어 있다.”

지체장애를 가진 사람에게서 받은 ‘Bear With Me(나를 견뎌 줘)’라는 메시지를 새로 고안한 서체로 박아 넣은 생활용품은 핀란드의 유명 디자인업체 ‘이탈라’로부터 의뢰받아 제작한 것이다. “내면의 여러 자아가 아침에 건네는 첫 메시지를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조 씨의 ‘기이한 디자인’은 이제 막 첫 장을 열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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