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소설]<33>아비의 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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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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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가
이기호 소설가
이제 시작인 건가. 전라도 장흥에서 광주행 시외버스에 올라탄 기준 씨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그의 옆 좌석에는 반팔 티셔츠에 학교 추리닝 하의를 입은 열 살 먹은 아들이 앉아 있었다. 아들은, 간만에 타는 시외버스가 마냥 신기한지 창문에 이마를 대고 앉아 있었다. 목덜미가 까무잡잡하게 타 버린 아들. 기준 씨는 그런 아들의 뒤통수를 괜스레 몇 번 쓰다듬었다. 혁수야, 아까 아빠가 한 말 잊지 않았지? 네…. 아들은 계속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기죽을 거 하나 없어. 평상시 너 하던 대로만 하면 돼. 네….

이 년 전, 일산에서 작은 인테리어 사업을 하다가 홀랑 ‘말아먹고’ 더불어 이혼까지 한 기준 씨는, 그때 막 유치원을 졸업한 아들과 함께 쫓기듯 장흥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살고 있던 아파트는 담보 대출금을 제때 내지 못해 허공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갑에는 당장 한 달 치 선불로 내야 할 고시텔 비용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찌감치 장흥으로 귀농해 표고버섯 농사를 짓고 있던 선배가 동네 빈집을 무상으로 내주고, 그곳 재배 하우스에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면, 기준 씨는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당시 그의 영혼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져 있었다. 자신이 마치 어떤 분말이 된 것처럼 후, 하고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장흥으로 내려온 첫해에도 그런 기분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표고버섯 종균 배양하는 일과 수확하는 일들을 배우긴 했지만, 그러나 저녁엔 늘 혼자 술을 마셨고, 그때마다 지나온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런 기준 씨를 다시 어떤 희망의 기운에 들뜨게 만든 것은 아들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들의 축구 실력. 전교생이 채 삼십 명도 되지 않는 분교에서 해가 질 때까지 늘 친구들과 축구공만 차대는 아들에 대해서 기준 씨는 처음엔 무심했으나, 차츰차츰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몇 번 축구공 차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긴 학원이 없으니 허구한 날 저렇게 노는구나, 하고 말았던 것이, 어어, 제법이네, 공에 힘이 있네, 하는 식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가 맞았다. 기준 씨의 영혼이 삶의 바닥을 치고 일어나,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하는 착각, 즉 자기 자식에 대한 이유 없는 확신과 신념 속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기준 씨는 이미 전화상으로 광주에 있는 한 유소년 축구팀에 가입 절차를 알아본 후, 한 달 치 회비까지 납부한 상태였다. 토요일마다 하는 거니까 매번 시외버스를 타고 함께 올라오면 돼. 기준 씨는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다. 아들의 실력을 보면 코치는 아마 깜짝 놀라서 당장 전학을 권유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스페인이나 영국으로 축구 유학을 권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유학비용은 어떻게 하지? 뭐, 그 나라는 버섯을 안 먹을까? 같이 가서 버섯 재배하면 되지. 축구협회에서도 발 벗고 도와줄지 몰라. 기준 씨는 유소년 축구팀 훈련이 진행되는 축구장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계속 그런 생각만 했다. 아들은 쭈뼛쭈뼛 코치에게 인사를 한 후, 제 또래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는 축구장을 향해 뛰어갔다. 기준 씨는 그런 아들의 등 뒤에 대고 파이팅,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면서 유럽은 물가가 비싸니까 차라리 브라질로 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첫 훈련이 끝나고 다시 장흥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기준 씨는 풀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조용히 물었다. 너,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았니? 아니요…. 아들은 고개를 작게 흔들면서 말했다. 근데 오늘 왜 그랬어? 공 한 번 제대로 차지 못하던데? 아들은 말이 없었다. 그의 아들은 오늘 첫 훈련을 겸한 연습경기에서 허둥지둥 아이들 뒤를 쫓아다니기만 했을 뿐,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골대 앞으로 무작정 달려 나가다가 같은 팀 선수가 찬 슛을 제 몸으로 막아내는, 민폐 스피드를 한 번 선보였을 뿐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오늘은 긴장해서 그런 걸 거야, 다음부터 잘하면 되지. 기준 씨는 가볍게 아들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머뭇머뭇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 그냥 우리 학교에서 축구하면 안 돼요? 아들의 말에 기준 씨가 아무 말 없이 인상을 찌푸리자, 아들이 곧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학교에서 축구할 땐… 다섯 명씩 하는데…. 여긴 열한 명씩 한단 말이에요…. 여긴 애들이 너무 많아요…. 기준 씨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곧 울 것만 같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이기호 소설가
#장흥#기준#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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