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속엔 역사가, 광고 속엔 풍속이, 글자마다 민족魂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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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95주년 기획]전문분야 연구에 동아일보 지면 활용해온 교수 4명

석·박사 학위 논문 674건, 국내 학술지 714건, 단행본 5587권, 연구보고서 140건….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 따르면 동아일보를 활용해 작성된 논문과 저술은 총 7000건이 넘는다. 95년간 차곡차곡 쌓인 신문을 토대로 의미 있는 연구 업적을 남긴 학자 4명을 만났다.

“옛날 신문에서 시대를 느낀다”


‘영화사에서 가장 황금기였던 20세기 초 조선에는 어떤 영화가 들어왔을까? 우리 영화 선배들은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기술은? 선전은? 알고 싶은데….’

어일선 청주대 영화학과 교수(영화감독)의 궁금증은 여기서 출발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 제작의 선구적 역할을 한 뒤 국내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1910∼1945년의 영화 필름 원본과 영상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한국 영화를 대표한다는 나운규의 영화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필름을 녹이면 자원이 되다 보니 광복, 전쟁을 거치면서 매니큐어 재료와 화학약품 재료로 대부분 사라진 것. 농부들의 밀짚모자 엮는 데도 필름을 한 바퀴 둘러서 쓰던 시대였다.

그가 찾은 방법은 1920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된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을 찾아 보관 중인 신문 하단의 광고를 분석했다. 어 교수는 “광고에는 굉장히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데 영화 기법과 주연, 개봉 일자, 얼마나 많은 관객이 들고 있는 상황인지, 어떤 외화가 많이 수입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춘향이가 말을 하는’ ‘칼라로 만든’ 같은 수식어에서 영화의 특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 교수는 ‘영화광고로 본 1930년대 영화 연구’ ‘1920년대 말 영화 배급 및 상영에 관한 연구’에서 동아일보 자료를 중심으로 20세기 초 국내 영화의 흐름을 조사했다. 일본 영화가 많이 수입됐을 것 같지만 다양한 유럽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고 소비했다는 점을 밝혀냈다.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였지만 뜨거운 열정을 가진 조선 청년들이 영화 제작에 일조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9월 한중일에서 동시 개봉하는 ‘사랑후애(愛)’를 준비 중인 그는 “영화 제작자로서 신문을 열심히 보게 된다. 신문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건 기사에서 여성사(史)가 보인다”


정지영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한국 여성학,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여성사 전문가다. 정 교수는 조선시대 호적대장과 조선왕조실록, 양반들의 문집과 설화를 분석해 ‘성별’이 어떻게 사회의 제도와 정책으로 만들어졌는지 연구했다. 눈길이 가는 연구 중 하나가 ‘근대 일부일처제의 법제화와 첩의 문제’다. 1920, 1930년대 동아일보 사건 기사를 중심으로 어떻게 첩 문화가 조선시대에서 사라지게 됐는지, 사회가 어떻게 첩을 인식하고 있는지 분석했다.

정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본처와 첩이 서로 죽고 죽이지 않았다. 첩과 정실부인 사이에 확실한 위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정실은 정실의 자리에 있고, 첩은 첩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서로 자리를 뺏는 사생결단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근대적인 결혼관계가 확립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호적에 누구 이름을 올리느냐에 따라 첩이 ‘진짜 부인’이 될 수 있게 됐다. 1921∼1939년 첩과 관련된 동아일보 기사는 총 408건. 자살 살인 고소 방화 상해 사이비종교 도망 인신매매 축첩폐지운동 등으로 상세하게 분류했다. 재산과 친권을 둘러싸고 본처와 첩, 남편 간에 각종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시기 관련 기사는 47건에 달했다.

1925년 4월 3일자 기사에는 ‘근래에 드문 진귀한 소송, 론산갑부 김영규와 첩 정남순과의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소송을 소개한다. 첩인 정남순은 남편 김영규를 상대로 산전산후 분만비 400원과 8년간의 생활비 9600원을 청구했다. 처음 첩이 될 때 본처와 이혼하고 정처로 만들어 주겠다고 해 동거해 오다가 임신한 지 7개월 된 정남순을 김영규가 내쫓았다는 것이다. 1937년 7월 18일에는 “첩의 소생에게도 교육비를 달라”며 백만장자를 상대로 첩이 교육비와 양육비를 청구한 사건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첩과 관련한 살인 사건이 95건에 이르는 점도 흥미롭다. 1920년대보다 1930년대에 더 증가했는데 피해자가 첩인 경우가 44건으로 가장 많았다. 대부분은 남편이 첩의 변심에 화가 나 첩을 구타하여 살해한 경우가 많다.

정 교수는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은 당사자는 첩이 가장 많았으며 일부일처제가 구축되는 상황 속에서 첩은 사라져야 될 존재로 (기사 내에서도) 묘사된다”고 말했다.

그는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근대사회로 향해가는 한국사회의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어학자에겐 맞춤법 연구 대상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문자의 사용법을 밝힌 이후, 20세기 전까지 한글 맞춤법에 대한 규정이 공식적으로 제정된 적은 없었다.

이지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어학과 교수는 “동아일보가 신문 활자를 조합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맞춤법에 대한 표준안을 갖추고 있었던 점은 국어학 전공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온라인 검색으로 옛날 동아일보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돼 관련 연구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20세기 초 언어가 어떠했는지 젊은 연구자들이 확인하고 연구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컴퓨터로 옛날 기사를 확대해서 볼 수 있게 된 점도 도움이 된다. 과거 연구자들은 옛날 신문의 세로글씨, 그것도 지금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활자와 한자를 해독하느라 눈을 찡그려서 읽어야 했다. 이 교수는 “우스갯소리로 나이 든 교수들은 백내장 녹내장 오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디지털화로 마음껏 자료를 크게 확대해서 보고 분석할 수 있어서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동아일보 연재물인 ‘명일식탁표’ ‘오늘 저녁엔 이런 반찬을’ 시리즈를 분석해 1920∼1945년 사용된 한국 음식명을 정리했다. ‘20세기 전반의 음식명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한데 모도 석는다 하야 혼돈밥(混沌飯)’처럼 당시에 쓰인 음식명과 유래를 설명하기도 하고, ‘낭화’처럼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음식명이 국수에 가까운 음식 이름이었다는 점을 알아냈다.

1938년 3월 4일 ‘생각만 해도 입맛나는 봄철의 조선요리(상)’에서는 ‘비빔국수’와 ‘국수비빔’을 함께 용어로 쓰고 있는데 기사에서 자주 쓰이는 빈도로 볼 때 ‘국수비빔’이 더 흔하게 쓰였다고 논문은 밝히고 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 신문 기사에도 자주 반영될 수밖에 없는 만큼 과거의 일상생활과 용어도 신문 기사로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 선수의 사진기사(왼쪽)와 요리 레시피를 소개한 ‘봄철요리 몇 가지’ 기사가 실린 1940년 동아일보 지면. 동아일보DB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 선수의 사진기사(왼쪽)와 요리 레시피를 소개한 ‘봄철요리 몇 가지’ 기사가 실린 1940년 동아일보 지면. 동아일보DB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

기사를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동아일보 자체에 대한 연구도 심층적이다. 채백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전 한국언론정보학회장)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연구’를 통해 1936년 8월 당시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재평가했다.

채 교수는 “그동안 일장기 말소 사건을 8월 13일에 조선중앙일보가 동아일보(8월 25일자 석간 2판 2면)보다 먼저 실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13일자 동아일보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사진이 실려 인쇄됐다”고 설명했다. 신문을 한 번만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몇 차례에 걸쳐 ‘판갈이’를 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 8월 13일 게재된 이후 8월 25일자에 ‘영예의 우리 손군’이라는 제하에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있는 손기정 선수 사진을 크게 싣자 일제는 곧 심각한 문제임을 깨달았다. 일장기가 지워진 것이 너무나 확실해 총독부는 바로 규제에 착수했고 결국 다수의 기자가 사직하거나 구속됐다.

채 교수는 “손기정 마라톤 우승 소식 이후 동아일보의 보도 태도에서 민족성이 살아나면서 일제도 방침을 바꾸어 탄압을 가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연구는 지난해 6월 단행본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커뮤니케이션북스)로 출간됐다.

채 교수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담론 연구도 동아일보 기사와 사설을 중심으로 했다. ‘한국언론과 5·18광주민주화운동 담론’에서 동아일보가 5·18을 어떤 용어로 불렀는지 1980년부터 2008년까지의 기사로 분석했다.

그 결과 ‘광주사태’는 2153회, ‘광주민주화운동’이 1247회 등장했으며 그 다음으로 광주항쟁(825회), 광주학살(417회), 광주민중항쟁(350회) 순이었다. 또 동아일보의 5·18 담론은 비극적 사태 담론(단순히 비극적인 사건으로 축소하는 담론), 진상규명 담론(5·18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는 담론), 명예 회복 담론(이전보다 공세적인 입장으로 5·18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주장하는 담론), 역사심판 담론(5·18 평가를 역사에 맡기자는 담론), 적극적 처벌 담론(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하게 주장하는 담론), 정치담론화 순으로 전개됐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채 교수는 동아일보 95주년을 맞아 미디어 전문가로서 당부했다. “종이 매체들도 온라인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궁극적으로 내용이 있는 콘텐츠에 생명력이 달렸다고 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 종이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으면 좋겠습니다.”


▼동아일보 기사를 연
구자료로 활용한 최근 논문들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전후 표기법 변화 연구:

당시 동아일보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이종현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5년)

―어느 근대인의 서해5도 순례:
1928년 동아일보 도서순례를 중심으로
(유창호,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2015년)

―서민담론의 역사적 변화:

동아일보 사설에서 구성된 서민 정체성
(이종명, 고려대 언론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4년)

―1920∼1930년대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남치형, 인문과학연구논총, 2014년)

―조선인의 식생활 이미지를 이용한 아지노모도 광고:
1925∼1939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조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 논문, 2014년)

―한국 경제성장기 냉장고 광고에 나타난 디자인문화 에 관한 연구

(양유진, 건국대 디자인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4년)

―1920년대 전반기 동아일보 소재 기행 담론과 기행문 연구(김경남, 한민족어문학회, 2013년)
자료: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동아일보#연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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