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의 태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가려져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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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새롭게 떠오르는 ‘絃의 영웅’들

미국의 잭 화이트(왼쪽 사진)와 데릭 트럭스(가운데 사진)는 1960년대식 블루스의 뿌리에 첨단 감각을 교묘히 접붙이는 게 특기다. 영국의 매슈 벨러미(오른쪽 사진)는 전기기타에 카오스 패드(화면 터치 방식의 전자음 조절기)를 장착한 ‘카오스 패드 기타’를 쓴다. 워너뮤직코리아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제공, 데릭 트럭스 홈페이지
미국의 잭 화이트(왼쪽 사진)와 데릭 트럭스(가운데 사진)는 1960년대식 블루스의 뿌리에 첨단 감각을 교묘히 접붙이는 게 특기다. 영국의 매슈 벨러미(오른쪽 사진)는 전기기타에 카오스 패드(화면 터치 방식의 전자음 조절기)를 장착한 ‘카오스 패드 기타’를 쓴다. 워너뮤직코리아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제공, 데릭 트럭스 홈페이지
《 20년 전 일이다. 신인 남자배우가 TV 광고에 나왔다. 그는 멋진 포즈로 날렵한 전기기타를 메고 치열하게 헤비메탈을 연주했다. ‘어머, 쟤 누구야’ 소리가 한국 여심을 흔들었다. 배우는 이정재였고 그 곡은 미국 밴드 익스트림의 ‘수지’였으며 제품은 10대 여성이 열광하는 초콜릿이었다. 요즘 10대의 선망인 첨단 이동통신서비스 광고에서는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앙증맞은 우쿨렐레를 여유롭게 연주한다. 과장된 기타 독주는 언젠가부터 우스꽝스러운 카우보이 기교처럼 치부되기 일쑤다. 담배 꼬나물고 파가니니처럼 연주하던 ‘기타 오빠’는 쿨한 ‘래퍼 오빠’ ‘디제이 오빠’한테 밀려났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타를 치는데 기타 영웅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기타의 시대는 결국 끝장난 걸까. 》

○ 현란한 독주 기술<음색과 아이디어


전문가들은 “기타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고 영웅은 지금도 탄생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열풍 이후 록 음악계에서 기타 독주의 비중이 준 데다 힙합 비트와 전자음에 가려 조명이 잦아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주 신작 ‘라자레토’로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오른 미국 록 가수 잭 화이트(39)는 21세기형 기타 영웅으로 꼽힌다. 1999년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멤버로 데뷔한 화이트는 1960년대 록과 블루스에서 길어 올린 탄탄한 연주 스타일에 21세기 팝의 경향을 결합해낸다. 영화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년) 주제곡이 화이트의 작품. 끈적거리면서도 날렵한 첨단 액체 금속 같은 기타 음색은 그의 전매특허다. 최근 본보와 e메일 인터뷰에서 기타 거장 제프 벡(70)도 화이트와 데릭 트럭스(35)를 눈에 띄는 젊은 기타리스트로 꼽았다.

한국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손가락은 리오넬 메시의 발가락을 닮았다. 동아일보DB
한국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손가락은 리오넬 메시의 발가락을 닮았다. 동아일보DB
21세기 대중음악에서 초인적 기타 연주의 중요도는 줄었다. 김희준 엠엠재즈 편집장은 “1990년대 이전에는 5∼6분 넘는 긴 노래가 전파를 많이 탔다. 기타가 악곡에 장식성을 가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최근 곡 길이가 줄고 가상 악기와 스튜디오 기술이 발전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고 했다. 기타의 역할은 인상적인 음색을 만들어내 곡 전체의 중독성을 높이는 쪽으로 이동했다. 극단적인 저음에 대한 천착도 그 일환이다.

한명륜 대중음악평론가가 추천한 콘의 두 기타리스트, 멍키(본명 제임스 섀퍼·44)와 헤드(본명 브라이언 웰치·44)는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1990년대 중반 등장한 미국 밴드 콘은 일반적인 여섯 줄짜리 기타보다 낮은 음을 내는 7현 기타 두 대로 헤비메탈 음향 법칙을 다시 정의했다. 김세황 기타리스트가 주목한 미국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애니멀스 애스 리더스의 토신 아바시(31)는 8현 기타를 쓴다.

○ 와룡과 봉추는 조명 한 발짝밖에…

전문가들은 작년 그래미어워드에서 ‘올해의 프로듀서’로 뽑힌 댄 오어바흐(35·‘더 블랙 키스’ 멤버)도 주목했다. 영국 록 밴드 뮤즈의 매슈 벨러미(36), 존 메이어(37), 인디 팝 뮤지션 세인트 빈센트(32)는 가창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출중한 기타 연주자로 지목됐다.

악기 연주의 전통적 가치가 여전히 중시되는 재즈 음악계에도 새 얼굴은 나타나고 있다. 김광현 재즈피플 편집장은 미국의 줄리언 라지(27)를 꼽으며 “1940∼50년대 연주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천재적인 연주를 들려준다”고 했다.

1980년대 스타일의 초인적인 연주 속도를 자랑하는 이들의 군웅할거도 여전하다. 기타리스트 이현석과 김세황은 록부터 재즈 퓨전까지 넘나드는 괴물 연주자 거스리 고번(43)을 추천했다. 이현석은 숀 레인(1963∼2003),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은 키코 루레이로(42·‘앙그라’ 멤버)와 거스 지(34·오지 오스본 밴드 멤버)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박주원(34)이 전문가의 주목을 독점했다.

어쨌든 지미 헨드릭스(1942∼1970)가 레이디 가가처럼 군림하던 시대는 동화 속 옛날얘기로 박제된 걸까. 이현석은 “잉베이 말름스틴의 ‘파 비욘드 더 선’, 에릭 존슨의 ‘클리프스 오브 도버’처럼 대중성과 연주력을 겸비한 새로운 형태의 기타 곡이 파장을 일으킨다면…”이란 가정을 달았다. 한명륜 평론가는 “대중을 휘어잡을 출중한 작곡 능력과 패션감각을 겸비한, ‘기타 든 문화 아이콘’이 나타난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초인적인 연주, 파괴적인 무대 매너. 지미 헨드릭스는 넘볼 수 없다.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제공
초인적인 연주, 파괴적인 무대 매너. 지미 헨드릭스는 넘볼 수 없다.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제공
▼지미 헨드릭스, 시대를 초월한 ‘기타의 神’▼

지금 나와도 통할 만한 영웅은


21세기 새 기타 영웅에 대한 의견은 전문가들 사이에 무지개의 결처럼 갈렸다.

누군가는 “존 메이어, 매슈 벨러미는 기타 연주력이 빠지지는 않지만 가창력이나 외모에 의해 과대평가됐다”고 했고, 다른 이는 21세기 헤비메탈 속주 기타리스트들을 거론하며 “소수 마니아 집단에서의 영웅에게 영웅이란 칭호를 붙이기 꺼려진다”며 주저했다.

그런데 당장 지금 여기로 소환해도 팝 음악계를 불태우고 영웅으로 군림할 만한 옛 기타 영웅을 꼽아달라고 하자 얘기는 달라졌다. 답이 지미 헨드릭스로 수렴했다. 연주력은 물론이고, 자극적인 힙합 비트와 전자음에 귀가 단련된 21세기 음악 팬까지 열광시킬 만큼 진보적인 음향을 기타 한 대로 뽑아내는 감각, 무대에서 기타에 불을 지르고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왼손으로 치거나 치아로 기타 줄을 뜯는 선구적인 무대 매너와 스타성이 헨드릭스를 ‘오래된 미래’로 꼽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은 “지금껏 만난 대다수의 국내외 연주자가 함께 꼭 한 번 연주해 보고 싶은 전설로 헨드릭스를 다퉈 꼽았다”면서 “무대 매너나 음향 감각을 고려할 때 지금 당장 데뷔한다고 해도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한명륜 대중음악평론가는 “기타 연주도 대단하지만 대중을 사로잡을 뛰어난 작·편곡 능력이 핵심이다. 헨드릭스는 21세기라도 팝스타였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김희준 엠엠재즈 편집장은 “헨드릭스가 살아온대도 요즘 같은 시장 환경에서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지미 페이지와 에릭 클랩턴, 제이슨 베커 같은 1960∼80년대 기타리스트는 요즘 들어도 뒤지지 않는 감각을 지녔다. 얼마든지 붐을 일으킬 만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전통의 가치가 진보적 실험과 양립하는 재즈 쪽에서는 웨스 몽고메리(1923∼1968)나 짐 홀(1930∼2013) 같은 고전적 거장을 ‘환생 스타’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김희준 편집장은 “재즈는 여전히 연주 중심이며 선대 연주자들 방식을 습득하지 못하면 다른 걸 하기 어려운 구조다. 아이디어의 확장, 장르의 혼합도 몽고메리, 홀이 다져둔 기반에서 이뤄졌다”고 했다. 김광현 재즈피플 편집장은 “다른 연주자들이 속주와 어려운 화성에 천착하던 시절에 홀은 새로운 코드 작법과 음향, 다른 연주자와의 호흡에 몰입했다”면서 “팻 메스니부터 줄리언 라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후대 연주자가 몽고메리와 홀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기타#지미핸드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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