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은 자신의 소설쓰기를 두고 ‘제멋대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의 변형된 자기 구현’이라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은희경(55)의 새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를 다 읽고 나면 작가가 구축한 세계를 입체적으로 경험한 듯한 느낌이 든다. 소설집에 실린 단편 여섯(눈송이는 육각형이다) 편은 각기 독립적이면서도 느슨한 고리로 연결돼 있다. 그 접점을 또렷이 드러내지 않아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아, 그런 거였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난달 28일 서울 홍익대 앞 카페에서 작가를 만났다.
“독립적인 연작 형식을 실험했는데 퍼즐 맞추는 기분이 들었다. 작품 간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를 모두 모아 놓으면 하나의 풍경이 그려지게 하고 싶었다.”
일본 시인 사이토 마리코(齋藤眞理子)가 한국어로 쓴 시 ‘눈보라’에서 한 구절을 따온 표제작에는 전주여고 시절 방학 기간 입시학원 수업 들으러 상경했던 작가의 모습이 비친다. 서울의 거센 추위와 짐작할 수 없는 도시의 크기. 소설 속 여고생 ‘안나’는 혼란스럽고 두렵지만 떠나버릴 수 없는 그곳을 받아들인다. 그동안 은희경이 창조한 인물들은 냉소와 위악이라는 단어로 압축됐지만, 이제는 좀 달라졌다. 이번 소설집에서 그들은 “이게 나야”라는 식으로 세상에 반응한다.
‘프랑스어 초급과정’에서 신도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그녀’는, 등단하던 해인 1995년 일산으로 이사 가서 19년째 사는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2002년부터 2년간 워싱턴주립대 객원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지낸 날들은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 녹아 있을 것이다.
“내 소설에 공간 변화가 많다. 그 모든 공간은 내가 체험한 곳이다. 그래야 인물의 동선이 그려진다. 낯선 곳에 여행을 가면 여고시절 서울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여행자가 돼서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소설 속에서 내 스타일의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는 인생이 큰 덩어리로 이뤄진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금성녀’에서는 ‘여고생이 의식하지 못했던 짧은 스침, 작은 호의가 이후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스치고 흩어지고 하는 찰나의 순간이 우리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닐까.
“나는 한 가지 관심사를 파고들어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세상만사에 호기심이 많다. 소설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취재를 가거나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아무 목적 없이 낯선 곳을 다니고, 나와 다른 것들을 접했던 경험이 어느 순간에 소설에 꿰어진다. 우연이 인생을 만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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