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한강의 첫 시집… 영혼의 균열을 노래하며 소생의 길 탐색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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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강 지음/165쪽·8000원/문학과지성사

‘여수의 사랑’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같은 소설로 강렬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아 온 소설가 한강의 첫 번째 시집이다. 작가는 2005년 단편소설 ‘몽고반점’으로 이상문학상 최연소 수상자 기록을 세운 작가로도 유명하다. 시집에는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로 등단해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는 시인이 소설 단행본 8권을 내는 동안 틈틈이 쓰고 발표했던 시 60편이 실렸다. 시집을 넘겨 보니 늦은 오후와 한밤, 한밤과 여명이 교차되는 저녁이나 새벽 시간을 배경으로 한 시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사물의 윤곽이 흐릿하고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진 시간. 시인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근원적인 상실과 슬픔, 영혼의 균열에 대해 노래했다.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중)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피 흐르는 눈 4’ 중). 그의 소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상적 삶에 안착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주인공들의 독백으로 읽히는 시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시의 화자는 삶을 체념하거나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부서지고도”(‘피 흐르는 눈 3’ 중) 살아 있음을, 고통과 대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시인이 20대 때 주로 쓴 것으로 보이는 시집의 5부(캄캄한 불빛의 집)에 수록된 시들이 특히 그렇다. “살아라, 살아서/살아 있음을 말하라/나는 귀를 막았지만/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막을 수 있는 노래가/아니었다”(‘유월’ 중)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통을 응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소생의 길을 탐색하는 이 시집은 소설가 한강이 그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추구했던 본질, 그 내밀한 기원으로 향하는 열쇠와 같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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