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찌라시,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 걸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은밀한 고급 정보? 단언컨대, 그런 찌라시는 없습니다

‘이 파일은 보호되어 있습니다. 문서 열기 암호를 입력하십시오.’

알파벳과 숫자가 섞인 6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비로소 파일이 열렸다. ‘대외비(對外秘) 외부유출 시 출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돼 있음.’ 서슬 퍼런 경고 문구와 함께 25개의 정보가 나타났다. 정치 사회 금융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고급정보들만 모았다고 알려진 속칭 ‘찌라시’(ちらし·일본어로 ‘정보지’라는 뜻)다.

대선이나 지방선거 등 크고 작은 선거를 앞두거나 유명인이 연루된 사건이 터질 때면 찌라시는 전방위적으로 퍼졌다. 그때마다 검찰과 경찰은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찌라시를 뿌리 뽑겠다”며 대대적인 수사를 반복했다. 이달 들어서도 경찰은 “최근 찌라시가 카카오톡 등을 통해 빠르게 유포돼 당사자들의 피해가 크다”며 특별 단속을 예고했다.

찌라시의 출처는 늘 베일에 싸여 있지만 ‘증권가’ ‘고급정보’ ‘연예인’ 등의 단어들이 주는 은밀함과 호기심에 대중은 취할 수밖에 없다.

찌라시는 대체 어떻게 누가 만드는 걸까.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어느 정도의 사실 확인 과정을 거친 것일까. 본보 취재팀은 경찰, 검찰, 대기업 전략기획실, 증권가 애널리스트, 국회의원 보좌관, 연예기획사 대표, 연예전문기자, 방송작가 등을 접촉해 찌라시의 제작 과정과 유통방식을 추적했다. 찌라시를 만드는 제작자도 직접 인터뷰했다. 그들이 전한 찌라시의 실체는 ‘은밀한 정보’라는 대중의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로운 정보가 없는 찌라시

현재 유통되고 있는 찌라시는 ‘주간정보’ ‘위클리(Weekly)’ ‘종합경영보고서’ 등 5, 6개 정도다. 매주 1∼3회 정기적으로 발행되며 가격은 연간 구독료 50만∼500만 원으로 다양하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분야별로 10개 남짓한 정보들이 모아진다. 매 회 A4 용지 5∼10장 분량이다. 각각의 정보는 한 줄짜리 제목과 함께 배경 설명이 담긴 3∼5개의 문단으로 구성된다.

취재팀은 7월부터 2개월간 유통됐던 찌라시를 모아 내용을 분석했다. 찌라시에 담긴 내용들이 언론을 통해서도 보도된 적이 없는 새로운 사실인지, 그렇다면 그 정확성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찌라시에 담긴 내용은 고액으로 은밀히 교환되는 정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질이 낮았다. 대부분 언론을 통해 보도됐던 내용을 반복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7월 19일 유통된 찌라시의 경우 ‘롯데그룹이 오비맥주 인수를 긍정적으로 검토, 맥주시장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음’이라고 했지만 이는 찌라시 제작 3일 전 통신사 및 인터넷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이었다. 다른 정보들도 짧게는 이틀, 길게는 2∼3주 전 보도된 기사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제작자의 주관적 의견이 담긴 정보들도 상당수였다. 언론에 보도됐던 사실에 ‘∼가 원인으로 판단됨’ 등 개인적 생각을 섞어 재가공하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공직사회에서 골프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다. 이는 남북 대치 국면이 장기화됐기 때문’ 등 이해할 수 없는 인과관계를 제시하거나 무리한 해석이 뒤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SK증권 전략홍보팀 관계자는 “최근 유통되는 찌라시에는 새로운 내용이 없다”며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뿐이고 억측에 가까운 해석도 많다”고 말했다.

찌라시 제작자가 말하는 찌라시

‘종합경영보고서’라는 이름의 찌라시를 만들고 있는 이모 씨(56). 기자 출신이라는 이 씨는 2000년 회사를 그만둔 뒤 13년째 찌라시를 만들고 있다. 최근 취재팀과의 인터뷰에 응한 그는 찌라시라는 표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사설정보지’라고 불리길 원했다. 이 씨는 정기간행물로 등록된 인터넷 업체도 운영 중이라고 했다.

종합경영보고서는 매주 수, 금요일 발행된다. 이 씨는 “공무원과 기자 출신인 팀원 4명과 함께 정보지를 만들고 있다”고 했지만 팀원의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다. 종합경영보고서는 PDF 파일로 만들어졌고 파일을 열기 위해선 6자리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그는 “1년 구독료는 500만 원이며 할인은 없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들도 우리 정보지를 읽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씨에게 “정보지에 담긴 내용들은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인데 고급정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미 보도된 사실이라도 내 전문적 해석을 덧붙여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급정보다”라고 했다. 알려진 사실이라도 자신의 주관적 식견과 각 분야의 동향을 파악하는 능력을 덧붙여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는 “임원진은 바빠서 모든 신문을 읽을 수 없다. 필요한 정보를 요약해 전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며 “일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여러 명이 모여 은밀히 정보를 교환해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취재팀이 만난 찌라시 제작자들은 소규모 인터넷 언론사나 정기간행물 업체를 운영하는 등 본업이 따로 있었다. 모두 본업의 경영이 어려워 ‘돈이 되는’ 찌라시를 만들어 판다고 했다. 한 제작자는 “우리도 솔직히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뿐”이라며 “정보라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일반적인 얘기다”라고 털어놨다. 인터넷 언론사를 운영하며 찌라시를 만들고 있는 A 씨는 “우리 언론사는 인지도가 너무 낮아 기업들에 광고를 부탁하기도 어렵다. 그 대신 사회 이슈나 소문을 모아 정리해 주는 대가로 연 50만 원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현재 21개 기업으로부터 정보료를 받고 있으며 이 덕분에 연 1000만 원 정도 고정적인 수입이 생겼다”고 했다.

‘제호 없는 신문’의 몰락

“증권가 정보지에 모 기업이 한나라당에 수백억 원을 줬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회창 필승론이 나오던 상황에서 1992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선 패배 후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한나라당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2004년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 100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현대차그룹 김동진 총괄부회장은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증권가에서 돌던 찌라시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과거 찌라시는 ‘제호 없는 신문’ ‘제3의 언론’ 등으로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었다. 대우증권에서 근무하는 한 애널리스트는 “과거 찌라시는 언론에서 보도되기 이전에 내용이 먼저 나오는 경우도 많았고 내용도 신뢰할 만했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찌라시 제작 업체는 20여 개에 달했다. 제작자 이 씨는 “일주일에 한 차례 기업의 고위간부, 경찰 정보관, 국정원 직원 등 소위 ‘정보맨’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점심시간에 미리 예약된 고급 룸살롱에서 만나 정보를 교환했다. 점심 메뉴는 늘 짜장면이었다”고 했다.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모든 기업은 자신들이 어떤 찌라시를 받아 보고 있는지 비밀에 부쳤다. 찌라시가 곧 기업의 정보력 수준을 말해줬다. 교환된 정보는 문서로 만들어 약속된 시간에 팩스로 전송했다. 시간은 주로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새벽이었다. 유출을 막기 위해 e메일 등 인터넷은 되도록 이용하지 않았다. 기업 홍보팀에서 근무했던 박모 씨(43)는 “찌라시는 매주 두 차례 임원진 회의에 보고서로 올려졌다. 당시 연 구독비가 2000만 원에 달하는 찌라시도 있었다”고 했다.

이 씨는 “거액을 주며 경쟁 기업에 불리한 역정보를 흘려 달라는 의뢰도 많이 들어오던 시기였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 씨가 이렇게 2000년부터 2005년 사이 찌라시를 팔아 남긴 돈만 9억여 원에 달했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유통이 빨라지고 수많은 인터넷 매체들이 등장하면서 찌라시는 점차 하락세를 겪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루머들은 인터넷에 수도 없이 등장했다. 여기에 언론사들의 치열한 속보 경쟁이 더해졌다. 2005년 범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단속도 겹쳤다. 찌라시는 맥없이 무너졌다.

‘명랑뉴스’의 규칙

연예인의 사생활을 담은 찌라시를 업계에서는 ‘명랑뉴스’라고 부른다. ‘유부남 영화배우와 아이돌 여가수가 불륜관계다’ 등 대부분 연예인의 성 생활이나 연예 관계를 전하는 내용들이다.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최근 카카오톡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빠르게 퍼지는 명랑뉴스는 유료로 거래되는 찌라시에는 한 건도 없었다. 흔히 찌라시는 증권사 직원들이 많이 사용한다고 알려진 메신저 프로그램 ‘미쓰리’ ‘FN’ 등을 통해 유포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증권가 전략기획실도, 애널리스트도 모두 카카오톡을 통해 명랑뉴스를 받고 있었다.

연예전문기자 이모 씨(30)는 “기획사들이 경쟁 관계에 있는 연예인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해 근거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유포한다는 게 업계의 전반적인 생각”이라며 “간혹 사실인 경우도 있지만 이는 전체 찌라시 양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이라고 했다. 방송사 작가로 일했던 김모 씨(26)도 “찌라시를 자세히 읽어 보면 맞춤법이 틀리거나 중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비속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현장에서는 찌라시를 ‘소설’로 여긴다”고 말했다. 실제 4월에는 한 누리꾼이 무차별적으로 찌라시를 만들어 온라인에 올리다 다른 누리꾼들이 거짓 정보임을 밝힌 적도 있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고든 앨포트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문 속에서 사건의 원인과 등장인물의 동기,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찾으려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연예인 A 씨의 성격이 나쁘다”라는 소문이 있으면 “왜 나빠졌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해 “A 씨의 성격이 나쁘다는 소문이 어떻게 퍼졌을까”로 궁금증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카카오톡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퍼지는 명랑뉴스도 이런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 프로포폴 중독 사건 관련 찌라시가 대표적이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병원에서 마약 효과가 있는 전신마취제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한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유명 연예인이 검찰의 수사를 받기 시작하자 찌라시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성행위의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등 “왜 프로포폴을 맞았을까”라는 질문의 답으로 채워졌다. 2주 뒤 찌라시 내용은 “어떻게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됐나”로 순차적으로 옮겨갔다. ‘남자 간호사나 직원들이 프로포폴을 맞고 잠든 연예인의 몸을 만지고 음란한 사진을 찍은 뒤 지인들에게 자랑하다가 알려진 것’이라는 결론을 끝으로 더이상 프로포폴과 관련한 찌라시는 유통되지 않았다.

‘고급정보를 안다’는 우월적 심리가 범인

‘최근 인기가 높아진 가수 김모 씨는 성격이 매우 나쁘다.’

A라는 사람이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가짜 찌라시’를 5명의 친구에게 전달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찌라시를 받은 사람 5명이 각각 또 다른 5명에게 전달하면 찌라시를 받은 사람은 5의 제곱인 25명이다. 또 한 차례 전달되면 125명, 10차례만 전달돼도 찌라시를 받아 본 사람은 약 1000만 명으로 대폭 늘어난다.

흔히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사회에서 다양한 네트워킹을 맺고 있는 ‘허브’(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숫자와 정비례한다. 스마트폰이 발달한 지금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허브가 될 수 있다. 여기에 고급정보를 내가 알고 있다는 ‘우월적 심리’가 더해지면 찌라시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소문이 무차별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누구의 말이 옳은지, 잘못된 정보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아무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라는 막연한 생각에 소문의 당사자만 큰 상처를 받을 뿐이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소문은 세상의 악(惡) 가운데 가장 빠르다. 그녀는 움직이면서 강해지고 나아가면서 힘을 얻는다. 처음에는 겁이 많아 왜소하지만 금세 하늘을 찌르고 발로는 땅 위를 걸어도 머리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밤마다 그녀는 어둠을 뚫고 하늘과 대지 사이를 날아다니고 한시도 눈을 감고 달콤한 잠을 자는 일이 없다. 그녀는 사실을 전하는 것 못지않게 조작과 왜곡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서동일·강경석 기자 dong@donga.com

#찌라시#명랑뉴스#증권가 정보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