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과 이항복 과거장서 첫 만남… ‘오성과 한음’ 설화는 오류”

동아일보 입력 2013-09-09 03:00수정 2013-09-0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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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덕형 400주기 학술대회
한음 이덕형이 30대 시절인 1590년대에 궁중화원 이신흠이 그렸다고 알려진 초상화의 모본.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1561∼1613)은 흔히 한국적 죽마고우의 대명사인 ‘오성과 한음’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는 한음이라는 넓고 깊은 그릇의 일면만 부각시킨 것이고 심지어 부정확한 것이기도 하다.

올해 400주기를 맞은 한음의 진면목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1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의 기조강연과 7개 주제 논문 발표가 이어진다.

41세에 처음 영의정이 돼 ‘흑두재상’이라 불리며 세 차례나 만인지상을 지낸 정치인, 임진왜란 전후 막후 외교의 중심축, 동서로 나뉜 붕당정치 와중에 균형감을 잃지 않았던 경세가, 최연소 대제학(30세)의 기록을 지닌 명문장가로서의 한음의 면모를 밝힌다.

그러나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오성부원군·1556∼1618)과 어린 시절 우정을 엮은 ‘오성과 한음’ 설화는 오류다. 두 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잘 만큼 절친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동문수학한 사이는 아니다. 둘은 1578년 과거시험장에서 처음 만났다. 백사가 스물둘, 한음이 열일곱 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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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과 어린 시절 동문수학한 대표적인 친구는 오히려 묵재 이귀(默齋 李貴·연평부원군·1557∼1633)였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장에 따르면 한음과 네 살 연상의 묵재는 윤우신 문하에서 동문수학했고 평생 남다른 우정을 나눴다.

한음은 동년배 관료 중에 늘 선두주자였던 반면 묵재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방관을 전전했다. 한음은 관직 생활 내내 봉록을 쪼개 그런 묵재의 생계를 도왔다. 묵재가 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손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달포 만에 목숨을 구해 냈다. 심지어 묵재가 자기 스승인 율곡 이이를 보호하려고 한음의 장인 이산해를 비판해도 그를 보호해 줬다.

흥미롭게도 백사와 묵재가 서인이었던 반면 한음은 동인이었다. 한음은 이들 중 나이는 어려도 출세는 늘 앞섰다. 그러면서도 당파를 뛰어넘는 우정을 평생 지켰다. 이는 사색당파로 분열된 조선 정계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포용력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후 거의 불가능해진 ‘서인과 동인의 우정’의 대명사로서 오성과 한음 설화가 부풀려져 유포된 것은 아니었을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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