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멈춰선 바이킹아, 울지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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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소형 놀이공원들… 추억도 사랑도 저만치 가네

1980, 90년대 개장해 ‘환상의 세계’를 선물했던 작은 놀이공원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쉴 틈 없이 움직이던 놀이기구들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소중히 쌓아둔 우리들의 추억도 놀이공원과 함께 사라지는 중이다. 사진은 1980년대 호황을 누리다 최근 폐장한 용마랜드. 만화 이미지는 폐장한 놀이공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웹툰 ‘안나라수마나라’ 중 한 장면이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소담출판사 제공
1980, 90년대 개장해 ‘환상의 세계’를 선물했던 작은 놀이공원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쉴 틈 없이 움직이던 놀이기구들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소중히 쌓아둔 우리들의 추억도 놀이공원과 함께 사라지는 중이다. 사진은 1980년대 호황을 누리다 최근 폐장한 용마랜드. 만화 이미지는 폐장한 놀이공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웹툰 ‘안나라수마나라’ 중 한 장면이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소담출판사 제공
“당신, 마술을 믿습니까.” 폐장한 지 오래된 놀이공원.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놀이기구 앞에서 마술사가 주문을 외운다. “안나라수마나라.” 그러자 멈춰버린 회색빛 놀이공원이 일제히 깨어난다. 몽환적인 진분홍빛으로 변한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들은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인다. 표를 파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의 네온사인도 다시 반짝인다. 나비가 환한 빛을 내뿜으며 날아다니는 놀이공원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사람들에게 마법이라도 걸려는 듯 환상적이다. 하지만 환상은 잠시. 환상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놀이공원에는 작은 불빛 하나 없다. 고등학생이 된 주인공의 눈에 비친 그곳은 모든 움직임이 멈춰버린 채 스산하기만 하다.

인기 웹툰 ‘안나라수마나라’(하일권 작)에 나오는 장면이다. 웹툰의 주무대는 폐장한 놀이공원. 누군가 마법을 풀어주지 않는 한 영원히 멈춰있을 것만 같다. 어른이 된 후 추억을 되새기려 찾은 누군가에게 안타까움만 남겨주는 곳. 문을 닫은 놀이공원은 웹툰 밖 세상에도 있다.

회전하지 않는 회전목마
조명 수백 개가 모두 꺼졌다. ‘Viking(바이킹)’이라고 적힌 영어 간판을 단 삼각뿔 모양 기둥에 붙은 조명 수백 개는 빛을 뿜어본 지 오래다. 조명에는 새까만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바이킹을 떠받치는 철제 구조물은 하늘색 페인트 흔적만 조금 남겨두고 모두 녹슬었다.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용마랜드. 4859m²(약 1470평) 남짓한 소규모 놀이공원이었던 용마랜드의 바이킹은 사람들의 신나는 비명을 동력 삼아 항해하지 못하고 정박해 있다.

용마랜드를 가득 채운 놀이기구 10여 개는 움직이지 않는다. 회전목마는 회전을 멈췄다. 목마 무리에서 부서진 뒤 튕겨 나온 말 몇 마리는 차가운 사체처럼 공원 안을 나뒹군다. 범퍼카는 찌그러진 채 널브러져 있거나 10중 추돌 사고 현장에서처럼 엉켜 있다. 범퍼카 좌석은 오래된 생선 비늘처럼 조각조각 부스러져 버렸다. 각종 놀이기구 안은 아이들 대신 누군가 버리고 간 벽돌과 쓰레기, 오랫동안 고여 썩은 물이 차지하고 있다.

다람쥐통의 녹슨 좌석 위에는 오랫동안 제 기능을 해보지 못한 안전벨트가 죽은 뱀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움직임을 모두 멈춰버린 놀이기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빠른 속도로 풍화되는 중이었다. 용마산의 마른 나무와 놀이공원 안에서 무성하게 자란 마른 잡초들이 초겨울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며 내는 스산한 소리만이 놀이기구들 주변을 맴돈다. 움직임은 물론이고 추억까지 모두 빠져나간 놀이공원은 “서울에 이런 곳이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음산하다.

회전목마는 더이상 회전하지 않는다. 열차도 레일 위를 달리지 않은 지 오래다. 한때 잘나갔던 용마랜드는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이 됐다. 회전목마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말 한 마리가 철로 위에 널브러져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회전목마는 더이상 회전하지 않는다. 열차도 레일 위를 달리지 않은 지 오래다. 한때 잘나갔던 용마랜드는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이 됐다. 회전목마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말 한 마리가 철로 위에 널브러져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1983년 문을 연 용마랜드는 영업 부진에 시달리다 지난해 1월 문을 닫았다. 공식적으로 폐장한 지는 2년가량 됐지만 사실상 4년 전부터 문을 닫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없으니까 직원 고용도 못하고 정문에 ‘혹시 누가 오시면 전화주세요’라는 종이 하나 붙여놓고 저 혼자 손님을 기다렸어요.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이 1년에 반 이상이었어요.” 윤성구 용마랜드 이사(57)는 7년 전부터 3년간 홀로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용마랜드를 지켰다. 용마랜드를 잊지 못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지 않을까 해서였다. 운이 좋으면 하루에 한두 번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하고 들어온 손님은 두세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 몇 명만을 태운 바이킹은 ‘왕년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힘차게 항해했다. “언제부터인지 전화벨이 안 울리더라고요. 4년 전부터는 저도 출근을 하지 않고 있어요. 관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용마랜드는 지하철 망우역에서 한참을 걸은 뒤 용마산을 향해 난 길을 따라 또 한참 걸어가야 나온다. 사람들은 용마랜드 대신 접근성 좋은 롯데월드나 서울랜드를 찾았다. 놀이기구도, 부대시설도 1983년 개장 당시 그대로 머물러 있는 이 낡은 놀이공원을 찾는 이는 없었다. 윤 이사는 관리자가 없어진 4년 전부터는 정문에 ‘용무가 있으신 분은 전화주세요’라고 적어놓고는 이따금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다. “용마랜드 내부 사진을 찍고 싶다며 찾아오는 대학생이나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전화를 걸어 오는 게 전부예요. 한두 명이라도 손님이 와서 ‘한 번 더 태워 달라’, ‘5명인데 2명 표 값만 받으면 안 되냐’며 떼를 쓰던 모습이 가끔은 그립습니다.”

용마랜드에도 10여 개 놀이기구에 조명이 모두 켜졌던, 휘황찬란한 시절이 있었다. 1983년 중랑구 최초의 야외수영장으로 개장한 후 놀이공원으로까지 시설을 확대하면서 하루 1만 명 이상의 손님을 받기도 했다. 어린이날이 되면 중랑구 공무원들이 용마랜드 입구에 특별 배치돼 질서 유지 활동을 벌였다. 용마랜드에서 관리인 일을 했던 차은수 씨(52·여)는 “손님이 많았던 덕에 야간 개장하는 날도 숱했다”며 “용마산에 둘러싸인 채 반짝이는 용마랜드는 정말 환상적이었다”라고 했다.

▼ 하루 수만명 찾던 꿈동산, 경영난에 한해 10곳 ‘고별사’ ▼

중랑구에서 20년 넘게 거주하며 용마랜드를 자주 찾았던 선덕현 씨(31)는 “신나게 놀이기구를 타고 내려오면 놀이기구 앞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어머니가 해주신 닭백숙을 배부르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대형 놀이공원에 비하면 시골장터같이 촌스러웠지만 나에게는 온갖 추억이 깃든 소중한 곳이지요.”

그 시절 용마랜드 앞에 늘어서 있던 천막식당에는 놀이공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손님들에게 내놓으려고 부쳐대는 빈대떡 냄새가 진동했다. 한때 불야성을 이뤘던 천막식당들에도 이제는 인적이 드물다. 용마랜드의 조명은 다시 켜질 거라는 기약도 없이 모두 꺼져 있다.

작은 놀이공원이 사라진다
“장복터널이 나오면 기분이 좋았어요. ‘이 터널만 지나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들떴던 거 같아요. 터널이 지나고 빛이 밝아지면 버스 차창 밖으로 산 아래에 쫙 펼쳐진 진해파크랜드가 보였어요. 바이킹이 왔다 갔다 하고, 마법의 양탄자가 오르내리고, 비명 지르는 소리도 들리고…. 그런데 이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네요.”(박혜경 씨·29·여)

누군가의 추억과 함께 사라진 건 용마랜드뿐만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작은 놀이공원들이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장복산 일대에 있던 진해파크랜드는 개장한 지 17년 만인 지난해 6월 폐장했다.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창원 지역의 유일한 놀이공원이 문을 닫는 순간이었다.

2만9752m²(약 9000평) 규모의 아담한 진해파크랜드에는 17년 세월만큼 곳곳에 많은 이들의 추억이 배어 있다. 김희진 씨(30·여)는 진해파크랜드가 개장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개그맨 이홍렬, 가수 신성우 씨 등이 참석하는 개막 행사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 씨는 “진해 사람이 모두 파크랜드에 온 것처럼 북새통이었다”며 “파크랜드 보안요원들이 ‘더는 못 들어갑니다’라고 외쳤고 사람들은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곳곳에서 실랑이를 벌였다”라고 했다. 바이킹이 잠시도 쉴 틈 없이 움직이고 마법의 양탄자가 어린아이들을 장복산 꼭대기까지 실어 나를 듯 날아올랐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놀이기구 타는 모습을 지켜보며 너 나 할 것 없이 즐거워했다. 그걸 보면서 김 씨는 ‘놀이공원이 생기는 건 참 좋은 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박혜경 씨 역시 파크랜드에 추억을 묻어뒀다. 그에 따르면 하얀색 건물과 하늘색 지붕으로 만들어진 궁전 모양 정문 앞에는 벤치가 있었다. 벤치에는 늘 동네 할머니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이렇다 할 유원지가 없던 때에 생긴 파크랜드가 신기했고, 또 그곳을 찾는 많은 사람을 구경하는 게 좋아서였다. 벤치에 앉은 할머니들은 학생들만 보면 “너거 어느 학교에서 왔노?” 하고 물었다. 박 씨는 초중고교에 다니는 내내 자주 파크랜드를 오갔고, 세월이 지나도 벤치를 지키던 할머니들에게 학교 이름을 세 번 바꿔 말하며 성장했다.

그런 추억들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지난달 27일 찾은 진해파크랜드의 놀이기구 14개는 모두 철거돼 흔적도 없었다. 놀이기구가 있던 터만이 황량하게 남았다. 궁전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정문과 후문만 가까스로 남아 한때 이곳이 놀이공원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이 찾지 않은 지 이제 1년이 조금 지났지만 놀이공원 보도블록 사이사이와 놀이기구가 있던 자리에는 잡초가 무수히 솟아났다. ‘급류타기’ 놀이기구가 있던 자리에 마구 돋아난 도깨비풀이 기자의 옷에 한가득 엉겨 붙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 잡초가 1년 만에 무성하게 자라네요.” 진해파크랜드 상무 윤한국 씨(54)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얼마 전에도 폐장 사실을 모르는 대학생들이 택시를 타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며 “입장권 창구를 두드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때마다 너무 미안해서 내 차로 일일이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개장 원년 하루에만 2만7000명, 한 해 65만 명이 찾았던 진해파크랜드는 2010년 연 입장객 수가 13만 명으로 크게 줄면서 폐장의 수순을 밟았다. 손님이 적어지자 1994년 3900원이었던 입장료를 한 번도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17년 세월, 바뀌지 않는 놀이기구에 질려버린 사람들은 더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일요일에도 손님이 700∼800명에 불과했다. 윤 상무는 “손님이 하도 없어서 자유이용권을 끊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난감했다. 혼자서 바이킹을 타는 손님도, 직원도 민망해하는 날이 반복되다 결국 문을 닫았다”라고 했다.

충북 제천의 유일한 놀이공원이었던 의림파크랜드는 규모를 3분의 1 수준으로 줄인 채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찾은 의림파크랜드에는 운영하지 않는 놀이기구 10여 개가 전원 코드를 모두 뽑은 채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규모를 줄인 뒤 재개장한 ‘의림지놀이동산’에 있는 바이킹도 이날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김준경 의림지놀이동산 사장(37)은 “지금은 바이킹 하나만 겨우 돌리는 수준인데 그마저도 단체손님이 왔을 때 원래 3000원이던 가격을 1000원으로 깎아줘야 겨우 운행할 수 있을 정도다. 되는 데까지는 운영해볼 생각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나 손님이 오면 몸을 따뜻하게 데우라고 놔둔 바이킹 앞 녹슨 군고구마 화덕만이 혼자 타고 있었다.

1년에 10개씩 추억이 문을 닫는다
제천 의림지 인근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최정환 씨(28)는 2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의림지놀이동산을 찾는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술을 한잔 기울인 날이면 늘 놀이동산이 생각난다. 그러면 술이 깰 때까지 친구들과 의림지 주변을 한참 동안 돈다. 마침내 술이 깼다 싶으면 바이킹을 탄다. 최 씨에게 의림지놀이동산의 바이킹은 어린 시절 추억이자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습관이다. 그는 “그나마 움직이는 바이킹마저 운행을 중단하면 정말 허탈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박혜경 씨에게는 이제 자신만의 놀이동산이 없다. 창원에 있던 돝섬 유원지 놀이기구는 운영 부진으로 철거된 지 오래고 마지막 남은 진해파크랜드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터널을 지나 빛이 나왔을 때 오르락내리락하는 바이킹도, 지그재그로 올라갔다 이내 내려가는 마법의 양탄자도 볼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추억을 묻어둔 작은 놀이공원의 폐장은 단순히 특정 업체의 폐장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추억이 사라지는 일이다.

추억의 상실은 매년 이어진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전국 유원지 중 한 해 평균 10개가량이 폐장한다. 지난해에만 영업 부진, 시설 사용기한 만료 등을 이유로 진해파크랜드, 마이산종합랜드, 부산어린이공원놀이동산 등 유원지 9개가 문을 닫았다.

유원지 사업체 수는 2007년 188개에서 2010년 303개로 늘었다. 오래된 중소 놀이공원의 고객을 끌어가는, 물놀이 시설 등 다양한 시설을 겸비한 복합테마파크 수가 크게 증가한 것이 유원지 수를 늘린 원인으로 추정된다.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사업체당 평균 연간 입장객 수는 2007년 30만8158명에서 2010년 22만8404명으로 줄었다. 서천범 한국레저산업연구소장은 “1980, 90년대에 개장해 노후화된 작은 놀이공원들은 개장 당시 시설 투자에 돈을 대부분 써버렸다. 100억 원이 넘어가는 대규모 신규 투자를 할 여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기존 놀이기구에 싫증을 낼 때쯤 새 놀이기구를 들여올 수 없게 되고, 이는 입장객 수가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중소 놀이공원들이 대형 테마파크의 주요 수익원인 식음료, 기념품 등의 판매에서 제대로 이익을 내지 못하는 것도 운영난의 원인 중 하나다.1980, 90년대 고성장의 흐름을 타고 개장해 지역 주민들에게 ‘작은 환상의 세계’를 보여줬던 소규모 놀이공원들은 어느새 ‘환상도 없고 재미도 없는 곳’이 돼 1년에 10개씩 문을 닫는다.

얼마 전 진해파크랜드에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는 윤 상무에게 “파크랜드가 폐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어릴 때 자주 왔었는데 내 추억이 있는 곳을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간곡히 부탁했지만 윤 상무는 놀이기구 14개가 모두 뜯겨 나가고 황량한 들판처럼 변한 파크랜드를 차마 보여줄 수 없어 그를 돌려보냈다. “다 뜯긴 내부를 보면 마음속에 있던 그분의 추억마저 모두 사라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부 모습을 끝내 보여주지 않은 겁니다.”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밝혀줬을 놀이기구 조명은 이제 들어오지 않는다. 사춘기 소녀의 꿈을 싣고 날았던 마법의 양탄자는 이제 날지 않는다. 작은 놀이공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그곳에 쌓여 있던 추억도 함께 사라져 간다.

창원=손효주·제천=권기범 기자 hjson@donga.com  

▼ 바이킹-대관함차는 1890년대 아이들이 즐겨타던 놀이기구 ▼

남북한의 놀이기구는 닮았다. 양쪽 다 일본에서 놀이기구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문을 닫은 용마랜드의 놀이기구 ‘몬스터’(왼쪽)와 평양 개선청년공원 유희장의 놀이기구. 김혁 테마파크 파라다이스 대표 제공
남북한의 놀이기구는 닮았다. 양쪽 다 일본에서 놀이기구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문을 닫은 용마랜드의 놀이기구 ‘몬스터’(왼쪽)와 평양 개선청년공원 유희장의 놀이기구. 김혁 테마파크 파라다이스 대표 제공
우리나라의 작은 놀이공원들은 죄다 비슷하다. 놀이공원 가운데에는 중세 유럽 스타일의 화려한 안장을 얹은 나무 말과 색색의 불빛으로 장식한 마차로 이뤄진 회전목마가 있다. 바이킹의 뱃머리에는 해적의 상징인 해골 모양이 붙어 있고, 그 기둥에는 후크 선장이 갈고리 손을 들고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놀이기구뿐만 아니라 심지어 콘셉트까지 비슷한 이유는 뭘까. 그리고 문을 닫는 놀이공원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을 테마파크 기획자인 김혁 테마파크 파라다이스 대표와 함께 알아봤다.

남북 놀이기구가 ‘통일’된 이유
우리나라에 놀이공원 붐이 일던 1980, 90년대 놀이기구의 주된 수입처는 일본이었다. 김 대표는 “당시에는 미국이나 유럽의 놀이 문화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데다 운송비용 문제도 있어 주로 일본에서 만든 놀이기구를 수입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입업자들의 일본 내 거래업체가 겹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봤다. 결국 국내 놀이공원은 비슷비슷한 것들로 채워지게 됐다.

작은 놀이공원의 제한적인 자금 동원 능력도 판박이 놀이공원을 만들어낸 이유다. 그들은 예산 탓에 비싼 놀이기구는 들여올 엄두를 못 냈다. 1992년 개장 당시 27억여 원을 투자한 충북 제천 의림파크랜드가 100억 원이 넘는 롤러코스터를 도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규모 놀이공원들은 일본이나 국내 다른 놀이공원의 중고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들여오는 방법을 택했다. 결국 작은 놀이공원들은 다 비슷한 기구를 운영하게 됐다.

북한의 놀이기구가 우리와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평양 개선청년공원 유희장에 있는 문어 모양의 회전형 놀이기구는 문을 닫은 서울 용마랜드의 ‘몬스터’와 똑 닮았다. 어린이열차의 앞모습은 일본 고속열차인 신칸센의 앞모습과 똑같이 생겼다. 모두 일본에서 수입해 개조했거나 재일교포들이 기증한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미국 카니발의 복사판
현대식 놀이공원의 효시는 미국의 ‘카니발’이다. 쉽게 말해 ‘떠돌이 놀이공원’인 카니발은 따뜻한 날씨를 찾아 남북을 오가고, 비가 오는 곳은 피해가며 손님을 찾는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의 소규모 놀이공원은 카니발이 상설화된 형태에 가깝다”고 했다. 국내 소규모 놀이공원의 대표적 놀이기구는 모두 미국 카니발의 그것과 같다.

카니발은 유랑의 대명사인 집시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1300년대 유럽에 처음 등장한 집시들은 유럽 전역을 떠돌며 음악을 연주하고 곡예를 선보였다. 이들은 당시 거의 유일한 동력이었던 말을 이용한 놀이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화려한 장식을 단 마차에 사람들을 태워주고 돈을 받았다.

카니발은 1800년대 말부터 북미 대륙을 떠돌기 시작했다. 물론 집시의 마차가 아니라 산업혁명을 전후해 엄청나게 발달한 놀이기구와 함께였다.

본래 중세 기마병의 훈련용 기구였던 회전목마는 독 일 출신의 미국인 마이클 덴첼에 의해 지금의 형태로 완성됐다. 그는 유럽에서 회전목마를 보고 영감을 받아 1814년 말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유니콘이 등장하는, 우리가 아는 회전목마의 원형을 만들었다. 1898년부터 회전목마가 전기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인기가 더 높아졌다. 우리가 흔히 ‘바이킹’으로 알고 있는 펜듈럼과, 대관람차의 원형인 페리스휠도 모두 1890년대 등장했다. 이들 모두 카니발이 애용하는 놀이기구였다. 결국 우리나라의 작은 놀이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기구는 모두 카니발의 흔적인 셈이다.

물론 우리 놀이공원이 카니발과 다른 점도 있다.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무엇’이 빠졌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그 무엇이란 바로 ‘비일상성의 제공’이라고 했다. 잠시 1980년대로 시계를 돌려 리어카에 실려 있던 스프링 목마를 떠올려 보자. 동네 아이들은 반동을 줘야만 위아래로 움직이는 재미없는 목마를 타기 위해 20∼30분씩 줄을 섰다. 리어카 할아버지가 떠나면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목마 리어카의 경쾌한 음악소리가 울리길 고대했다.

가끔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를 놀라게 하고, 골목길을 놀이공원으로 바꾸는 비일상의 마법. 그것이 바로 우리네 놀이공원이 놓친 것이 아닐까.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놀이공원#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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