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우리만 몰랐던 우리 보물 민화 찾아 10년을 떠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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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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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화 세계화’ 위해 어디든 달려가는 정병모 경주대 교수

11일에는 마침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한국민화협회 회원전이 열리고 있었다. 정병모 교수가 가장 마음에 드는 현대민화 작품(조은희 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일터가 경주인 그는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와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는다. 그는 ‘민화의 세계화’라는 자신의 과업이 마무리되면 민화 작가들의 작품 가치도 훨씬 올라갈 거라며 웃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1일에는 마침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한국민화협회 회원전이 열리고 있었다. 정병모 교수가 가장 마음에 드는 현대민화 작품(조은희 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일터가 경주인 그는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와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는다. 그는 ‘민화의 세계화’라는 자신의 과업이 마무리되면 민화 작가들의 작품 가치도 훨씬 올라갈 거라며 웃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그해 여름엔 모두가 미쳐 있었다. 온통 축구 얘기뿐이었다. 모든 일과는 ‘축구 시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예선, 16강, 8강, 4강전까지. 경기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더 깊은 집단적 흥분 상태에 빠져들었다. 수백만 명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온 국민의 기대 속에 월드컵대표팀은 어느덧 독일과의 준결승전을 치르고 있었다. 같은 시각, 그는 쥐가 난 두 다리를 부여잡고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그날따라 이코노미석이 유난히 좁게 느껴졌다. 다리를 잠시 폈다 거둬들일 땐 ‘뚝, 뚝’ 소리가 났다. 잠이 들면 좀 나을 텐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스스로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 작품들을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
인천을 출발한 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기장의 굵직한 저음이 실내의 어둠을 깨웠다. “월드컵 결승 진출에 도전했던 한국 대표팀이 아쉽게도 0 대 1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일제히 사람들의 탄식이 쏟아졌다. 기적이라 불렸던 한국 축구의 질주는 그렇게 멈췄다.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모두가 꿈에서 돌아온 그날, 그는 새로운 꿈을 향해 가고 있었다. 2002년 6월 25일 밤이었다.

○ 도록 한 권이 마음을 사로잡다

그해 3월 제자 한 명이 약속도 없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제자는 겨울방학 해외 연수에서 돌아올 때 구했다는 도록 한 권을 불쑥 내밀었다. 2001년 10월부터 2002년 1월까지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이하 기메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향수’ 전시회를 소개한 책자였다.

그는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의 짜릿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기발한 상상력과 자유로움, 화려한 색채, 친근한 이미지, 그리고 해학을 버무린 밝고 흥겨운 정서까지. 세계적 거장인 이우환 화백이 평생 수집해 기메박물관에 기증한 작품들이었다. 당장 파리로 달려가 이 매력적인 녀석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기메박물관에 있는 한국의 유물들을 모사(模寫)하기 위한 팀을 꾸렸는데, 그에게 자문 및 감수를 부탁한 것이었다. 열 일 제치고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게 월드컵 준결승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사흘간의 강행군 끝에 거의 일이 마무리됐다. 그동안 박물관 측 인사와도 제법 친분을 쌓았다. 슬쩍 본색을 드러내도 되겠다 싶었다. ‘한국의 향수’전 작품들을 보여 달라는 그의 부탁에 피에르 캉봉 동양미술담당 큐레이터가 흔쾌히 ‘OK’ 사인을 보냈다.

파리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오전 10시, 지하 1층의 민화 수장고(收藏庫)가 열렸다. 그는 박물관이 문을 닫는 오후 5시까지 창고를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담당자가 민화를 꺼내오면 그는 작품을 뚫어져라 살피고 또 살폈다.

수준 높은 작품을 한꺼번에 만난 반가움과 왜 하필 이리도 먼 곳에서일까란 안타까움이 그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이토록 매력적인 예술품이라면 한국의 대표적 문화상품으로 충분히 세계시장에서 통하겠다 싶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그 일을 내가 한 번 해보자.’

이후 그는 한국 민화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누볐다. 뒤돌아보니 마치 누가 각본을 써 놓은 듯했다. 도록을 보게 된 것도, 기메박물관에 가게 된 것도 그로선 우연의 연속이라 여길 만했다. 건축학도였던 그가 한국미술사로 석·박사 학위를 딴 것과, 교수로 부임한 첫해 겨울 중국으로 떠났다가 ‘민간연화’(중국의 민화)를 접하게 된 것은 일종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 우리 것을 찾아 세계를 떠돌다

그는 2000년대 중반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만난 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잊을 수 없다. 개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600점의 한국 민화를 소장한 사람이었다. 주한미군으로 일하던 1960년대 인사동에 갔다가 한국인들이 불쏘시개로 쓰려던 것을 챙겨 왔다고 했다. 한국인으로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소중한 문화자산을 지난 100년간 우리 스스로 버려두고 있었던 겁니다.”

한국 민화의 해외 반출 역사는 19세기 후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문화조사관 존 버나도,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라 등이 1880년대 광통교 등지에서 민화를 다량 구입해 갔다. 일본에서는 민예운동 창시자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영향으로 한국 민화를 수집하는 붐까지 일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선 민화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서민들의 그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괜찮은 민화들은 죄다 해외로 나갔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해외조사는 그래서 더 절실했다. 그는 민화에 대한 단서만 있으면 어디든 날아갔다.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지만 묵묵히 전진했다. 그러다 보니 ‘헛걸음’이나 ‘문전박대’는 일상용어였다. 뉴욕의 유명 미술품 딜러인 강금자 씨와의 첫 만남도 그랬다. 강 씨가 각국의 박물관에 민화를 다수 공급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무작정 맨해튼으로 날아갔다. 이튿날 오후 약속시간에 듣게 된 건 “바빠서 약속을 잊어버렸다. 내일 다시 오라”는 황당한 대답이었다.

“이름 없는 학자다 보니 수모를 당한 거였죠. 그래도 참았습니다. 자존심보다는 그분이 가진 정보가 제겐 더 중요했으니까요.”

강 씨와의 만남은 큰 소득을 안겨줬다. 세계 미술계가 한국 민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꿈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되찾았다.

북미 대륙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금자 씨’가 도움을 줬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의 한국미술 담당 큐레이터였던 백금자 씨가 그였다. 1998년 ‘희망과 염원: 한국의 채색화전’을 기획했던 백 씨는 그가 민화를 찾는 것뿐 아니라 민화이론을 재정립하는 데도 적잖은 기여를 했다.

그는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등을 1년에 5, 6개국씩 10년에 걸쳐 다녔다. 학술연구진흥재단에서 받은 연구지원비는 비용을 대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강연료와 원고료는 물론이고 사비까지 털었다. 그러면서 찾아낸 민화가 해외에 나가 있는 것만 5000점이 넘었다.

미술계에 이름이 나면서 해외강연도 잦아졌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등 미국 명문대들은 물론이고 영국 대영박물관과 런던대, 중국 허난(河南)대까지 앞다퉈 그를 초청했다. 샬럿 홀릭 런던대 교수는 “그의 활동 덕분에 한국 민화에 대한 세계적 인식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 보물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지금은 국내 민화인구(민화작가로 활동하거나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가 10만 명이 넘지만, 이런 대중적 인기를 누린 것은 10년이 채 안 된다.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창고에 처박혀 있거나 가치를 폄훼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2009년 강원의 한 박물관을 찾은 그는 한쪽 구석에 있던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고종 어진을 그렸던 채용신(1850∼1941)의 ‘삼국지연의도’(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였다. 박물관 측은 작품을 구입하고도 그 가치를 몰라, 다른 곳에 맡겨뒀다고 했다. 한 폭 가격이 수억 원에 이르는 보물이 자칫 묻힐 뻔한 것이었다. ‘책거리(서재의 풍경을 담은 그림)’ 장르의 최고봉인 이형록(1808∼1883 이후)의 작품도 그랬다. 이형록은 1864년 이응록, 1871년 이택균으로 두 번 개명했다. 이형록의 작품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데, ‘이응록’이란 인장이 찍혔다고 겨우 몇백만 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가 직접 조사한 국내 민화만 해도 줄잡아 1만여 점. 그렇게 1차 목표였던 민화 ‘전수조사’는 거의 마무리됐다. 그는 이제 2단계를 실현하고자 한다. 명품도록이 그것이다. 국내 민화작가들은 아직도 30년 전 일본 고단샤가 발간한 ‘이조의 민화’(1982)나 그 해적판을 구입해 보는 실정이다. 그는 일본의 ‘우키요에’(일본의 서민회화)처럼 민화를 세계화하기 위해선 반드시 명품도록을 발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각국 도서관에만 보내도 세계화의 절반은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다. 중국도 최근 ‘민간연화’를 8대 민족문화 집중지원 미술 분야로 선정한 뒤 20권짜리 도록부터 냈다.

물론 간단한 일은 아니다. 세계 각지의 박물관과 개인에게 지급할 저작권료만 따져도 줄잡아 수억 원이 든다. 한 개인이 감당할 무게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초조해하지 않는다. 분명 10년 전과 지금은 민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일월드컵의 감동이 멎은 지 10년. 그 장면을 보며 국가대표를 꿈꿨던 어린 선수들은 2012년 8월,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이라는 기적을 이뤄 냈다. 멈춘 줄만 알았던 2002년의 질주가 소리 없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휴대전화에도 지난 10년간 지워지지 않은 글귀가 있다.

‘민화를 세계로.’

정병모 경주대 교수(53·한국미술사)의 질주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민화#정병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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