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서적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소명출판이 최근 내놓은 책들이다. 작품 해제에 깨알 같은 주석을 곁들인 번역서이거나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쓴 연구서들로, 학술적 가치는 뛰어나지만 제목을 보면 선뜻 집어 들기 어려운 책들이다. 주석 하나로 한쪽을 꽉 채운 책도 있다. 출판계 현실이 힘들고 학술 분야의 출판은 더욱 어려운 현실에서도 소명출판은 이 같은 학술서적을 매년 50∼70권씩 꾸준히 출간해왔다.
“저자들이 주석 하나를 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새우고 발품을 팔았을지 생각하면 책이 완성될 때 덩달아 환희를 느낍니다.” 기승을 부리는 삼복더위 속에 서울 서초동 소명출판 사무실에서 만난 박성모 대표(49·사진)는 “그런 저자들을 만나는 게 좋고 훌륭한 책을 내는 일이 재미있기에 빚을 지고서도 계속 버틴다”고 했다.
국문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한 박 대표는 4년간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다 1998년 2월 독립해 소명출판을 설립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로 많은 출판사가 문 닫던 시절 무모한 도전이었다. “불황으로 주변에 빈 사무실들이 속출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사무실을 빌릴 수 있었어요. 지금도 건물 주인이 14년 전과 똑같은 임대료를 받으니 고맙죠. 요즘 세상에 학술서적 출판으로 버티는 게 대단하다고 하면서요.”
초판은 통상 500∼700부 찍는다. 주요 고객은 전국의 도서관이다. 개인 독자에게 팔리는 책은 평균 100권이 조금 넘는다. 주로 박사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책을 찾는다. 그나마 한국연구재단에서 동양고전 번역을 지원받고 대한민국학술원이 선정하는 ‘우수학술도서’에 매년 10여 권이 꾸준히 오르면서 조금 숨통이 트이고 있다.
“늘 문 닫을 상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죠. 그나마 각종 지원 없이는 운영이 어려워요. 그런데 올해 학술원 예산이 크게 줄었어요. 학술서적은 대중서적의 밑거름인데, 이러다 지식후진국이 될까 걱정입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그는 “신진학자를 발굴해 책을 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명망가를 저자로 모시려고 쫓아다닌 적은 없어요. 저희가 명망가를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학계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학자들 중에 저희 출판사에서 책을 내지 않은 분이 거의 없어요.”
학술전문 출판사라 할 만한 곳은 국내에 대여섯 군데. 이렇다 보니 출판을 부탁해오는 저자들이 몰린다. 책을 내기로 확정한 저자만 2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잘 팔리는 책’을 만들기 위해 대중적인 인문서를 낼 법도 하지만 박 대표는 꼬장꼬장하게 검증한 학술서적만 고집한다. “대중서를 몇 권 내봤는데 주석이 없으니 신뢰할 수 없더라고요. 주석이 없으면 학계에 오류가 전승되는 최악의 상황도 발생합니다. 요즘 많은 젊은 저자들이 스타 저자가 되려고만 하는데, 쉽고 재미있는 책을 만들려다 자칫 왜곡된 지식을 양산할 우려도 있어요.”
올해 소명출판은 2009년부터 출간해온 ‘임화문학예술전집’을 총 8권으로 완간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연극연출가 등으로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친 월북작가 임화(1908∼1953)의 작품과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대작이다. 박 대표는 “임화는 근대문학사의 거대한 산”이라며 “소명출판의 책들로 한국문학사를 완성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