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낭독극 ‘은교’의 3인방인 이적요 역의 남명렬, 은교 역의 정다운, 서지우 역의 홍서준(왼쪽부터). 대본을 읽은 기자가 “영화처럼 야한 장면은 없다”고 지적하자, 남명렬은 “(있어봐야) 어차피 말로하는 건데 뭘∼”이라고 말해 웃음을 유발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내 마음속 영원한 젊은 신부 은교…. 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죽음을 앞둔 이적요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인 은교에게 힘겨운 독백을 한다. 은교는 할아버지의 숨겨둔 마음을 뒤늦게 알고 자책하며 흐느낀다. 대본을 읽는 배우들의 목소리는 회한에 젖었고 구슬펐다. 일흔 노인과 열일곱 소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얘기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서울 대학로의 한 지하 연습실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소설로 30만 부, 영화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박범신 작가의 ‘은교’가 무대에 오른다. 12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예장동 문학의집서울에서 열리는 문학나눔콘서트 ‘시간 혹은 홀림’에서다. 1시간 분량의 영상 낭독극으로 꾸며지는 ‘공연 은교’는 연극배우들의 낭송과 영상이 어우러져 색다른 ‘은교’를 만날 수 있다. 작가도 참석해 마지막 부분을 직접 낭독한다.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3일 연습실을 찾았다.
소설 은교는 원로 시인 이적요가 열일곱 여고생 은교를 만나면서 잊고 지냈던, 포기했던 열정과 욕망을 되찾게 되고,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가 이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서로 파멸로 치닫는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박해일(35)이 이적요를, 신인 김고은(21)이 은교 역을 맡아 캐스팅부터 화제가 됐다.
공연에는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남명렬(53)이 이적요로 나오고, 올해 경인여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한 신인 배우 정다운(21)이 은교로 출연한다. 영화에서는 박해일의 노인 연기가 어색하다는 평도 나왔지만 연륜이 깊은 남명렬은 제 옷을 입은 듯 이적요를 살려냈다.
“2년 전 소설을 읽을 때 이적요의 마음이 제게 막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소설에선 60, 70대 남성을 그리고 있지만 남자들은 50대만 되면 나이 듦을 느껴요. 내면의 열정은 여전하지만 예전과 달리 표현에 조심스럽고, 결국 스스로 욕망을 포기하죠. 하지만 은교는 이적요의 욕망을 다시 살려냈죠.”(남명렬)
은교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욕망이 출발하는 시발점이다. 천진하고 순수한 은교는 작품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은교 역의 정다운은 교복이 잘 어울리는 앳된 신인으로 특히 목소리가 청아했다. 그는 “길 가다가 할아버지만 보면 ‘저분들도 다 욕망이 있으시겠지’라며 혼자 생각하는 버릇이 들었어요. 호호.”
영화에서 단선적으로 그려졌던 서지우(김무열)의 내밀한 고민과 갈등은 홍서준이 연기하는 공연에서는 원작과 가깝게 치밀하게 펼쳐진다. 원작에서처럼 홍서준도 짙은 쌍꺼풀이 인상적인 배우다. 서지우의 지시를 받고 은교에게 집적대지 말라며 이적요에게 모욕감을 안겨주는 ‘노랑머리’는 이승우가 연기한다.
연출자 성경선은 “은교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 욕망에 관한 얘기다. 한 여자가 출발점이 되어 두 남자의 욕망이 부딪히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잠깐의 휴식 시간. 밖에 나갔다온 남명렬이 작은 잎사귀 하나를 들고 와 한번 씹어보라고 정다운에게 건넸다. 조심스레 받아든 정다운이 한입 물고는 “아이∼써”라며 얼굴을 찌푸렸고, 남명렬은 웃었다. “그 쓰디쓴 맛 때문에 첫사랑의 맛이라 불리는 라일락 잎이지.” 은교의 숨겨진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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