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자들이 지나갈 때 삶이 아득… “꽃이 그냥 저만치에 있는 거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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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물건’ 김정운 씨 - ‘은교’ 박범신 작가 만나다

‘남자의 물건’의 저자 김정운 씨와 ‘은교’의 저자 박범신 씨가 만났다. 후반생을 살고 있는 두 남자는 ‘은교’로 상징되는 ‘불멸의 처녀성’과 ‘늙어감의 슬픔’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북이십일 제공
‘남자의 물건’의 저자 김정운 씨와 ‘은교’의 저자 박범신 씨가 만났다. 후반생을 살고 있는 두 남자는 ‘은교’로 상징되는 ‘불멸의 처녀성’과 ‘늙어감의 슬픔’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북이십일 제공
“삶이 아득해져요.”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씨(50·전 명지대 교수)가 “젊은 여자를 보면 (은교를 바라보듯) 애틋한 마음이 생기느냐”고 묻자 박범신 작가(66·상명대 석좌교수)가 답한 말이다.

“출근할 때 상명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에 걸려 멈춰요. 햇빛이 쏟아지고 여대생과 여중고교 애들이 기운차게 내 앞을 지나가요. 삶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 나의 돌이킬 수 없는 세월도 지나가죠. 김소월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그냥 꽃이 저기 저만치에 있는 거지. 그러면 상처와 슬픔이 생기죠. 툴툴 털고자 하지만 여전히 남은 그 슬픔이 내 문학적 동력이지요.”

‘남자의 물건’이 ‘은교’를 만났다. 김 씨는 올 초 출간된 ‘남자의 물건’ 집필 과정에서 박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박 작가의 소설 ‘은교’를 소재로 두 남자가 나눈 대화가 책에 짧게 언급돼 있다. 그런데 ‘남자의 물건’을 펴낸 출판사 북이십일이 책에 넣지 못한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 동영상 ‘오 나의 처녀, 은교’를 제작했다. 동영상은 카드북닷컴(www.cardbook.com)에 올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여인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을 선생님이 써주신 덕분에 남자들의 그런 욕구에 대한 면죄부가 생긴 것 같아요. 저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죠.”(김)

“남주인공은 70세고 여주인공은 17세 소녀죠. 평생 자기 절제를 해온 노시인에게 나타난 은교는 단순히 젊은 아이가 아니에요. 불멸의 처녀성을 뜻하지요. 처녀가 늙어 애 낳고 시집가고 그러는 것은 노인의 머릿속에 없는 거예요.”(박)

김 씨는 ‘은교’를 읽으면서 칠십 노인의 열일곱 소녀에 대한 사랑에 자꾸 감정이입이 돼 몇 번이나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 젊은 여성에 대한 욕망을 품을 수 없다고 사회가, 그리고 스스로 규정짓는 게 슬프다”고 털어놓았다. 박 작가는 “안 된다고 할 때 갈망은 더 커진다. 본성을 드러낼 수 있고, 사랑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비록 나는 못했지만…”이라며 웃었다.

박 작가는 교수로서 젊은 제자, 특히 여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대담하다 싶을 만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해까지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다. “교수인 내 입장에서 아이들은 영원한 ‘버진(처녀)’이에요. 열일곱 살 그대로 있는 거죠. …교수가 60대쯤 됐을 때 제자들도 늙어 50대쯤 되면 참 평화스러운데, 나는 60세가 됐지만 제자는 아직도 20대 초반이죠. 거리가 많이 생기니, 마음이 아프고 상처 받는 일이 많아요.”(박)

인터뷰 내내 50대에 갓 진입한 남자는 70세를 향해 가는 또 다른 남자에게 ‘늙어감에 대한 슬픔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물었다.

“전 미리부터 늙어가는 게 참 슬퍼요. 그 슬픔이 소설에 잘 나와 있지요. 하지만 노시인이 결국 은교의 손을 만지는 걸로 끝이 나는데, 전 굉장히 비겁하다고 봤어요. ‘이렇게 슬프게 해놓고 손만 만지고 가게 하나’, 그런 생각을 했지요.”(김)

“가질 수 없기에, 은교죠. 그렇기에 우리 마음속에 갈망이 남는 거고요. 전 늙어가는 게 불편하진 않아요. 하지만 말할 수 없이 슬프죠. 하지만 깊은 슬픔을 간직하는 게 오히려 좋다고 봐요. 또 무언가를 끝없이 갈망하고자 해요. 그러면 진정 늙은 건 아니니까요.”(박)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채널A 영상] 김정운 “내가 일하는 게 재미있어야 된다”


▲동영상=박범신 작가가 밝히는 ‘은교’ 비하인드 스토리
#박범신#김정운#은교#남자의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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