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계단이 아니고… 문, 문이 아니다… 송은아트스페이스 ‘Inexistence’전

  • 동아일보

아르헨티나 작가 에를리치 씨

수직이 아닌 수평 구조의 ‘계단’을 선보인 레안드로 에를리치 씨.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수직이 아닌 수평 구조의 ‘계단’을 선보인 레안드로 에를리치 씨.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미로처럼 중첩된 계단은 수평 구조로 설치돼 사람이 오르내릴 수 없다. 분명 문 밑으로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지만 방문을 열면 다시 어두운 방이다. 탈의실에 들어서면 벽면에 부착된 거울이 서로를 비추면서 무한 증식하듯 똑같은 공간이 이어진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송은아트스페이스가 마련한 아르헨티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 씨(39)의 ‘Inexistence’전은 현대미술과 친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한다. 보는 이의 눈과 지각을 속이는 ‘트릭’을 활용한 4개의 설치작품은 평범한 것에 새로운 조형적 체험을 부여하고, 관객의 참여와 체험을 유도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맞아 내한한 작가는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관찰, 일상의 체험을 철학적 각성과 흥미로운 발견의 계기로 삼는다. “나는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 대중이 쉽게 접근하면서도 미술적으로 흥미로운 작업을 만드는 것이 의도다. 매일 접하기 때문에 의문과 새로움을 못 느끼는 생활공간에 약간의 트릭을 사용해 새로운 지각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술대학을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그는 2000년 휘트니, 2001,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아르헨티나 대표작가로 참여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영장’은 물이 없는 풀장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바꾸어 고정관념을 뒤엎고 현실의 이면을 제시하는 그의 장기를 보여준 작품이다.

그는 “내 작업은 허구를 창조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며 “관객은 각자 감상과 체험의 주체가 된다”고 말한다. 송은문화재단의 창립자가 사용한 낡은 가구와 집기로 재현한 ‘명예회장의 집무실’도 그런 작업이다. 유리벽으로 나뉜 공간의 한쪽엔 집무실, 다른 쪽엔 의자가 놓여 있다. 관객이 자리에 앉는 순간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집무실에 있는 유령처럼 비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

전시는 7월 7일까지. 02-3448-0100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미술#전시#레 안드로 에를리치#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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