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로서 ‘도구적 인간’인 장영실을 욕망하는 근대적 인간으로 형상화한 국립극단의 신작 ‘궁리’. 국립극단 제공
조선 최고의 발명가였던 장영실. 그는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관노의 신분으로 정3품 벼슬(상호군)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사적인 기록은 드물다. 그 마지막 행적은 역사적 실종에 가깝다.
국립극단의 신작 ‘궁리’(이윤택 작·연출)는 그 미스터리를 휴머니즘적 상상력으로 풀어간다. 세종을 도와 중국 천문질서로부터 독립된 조선의 독자적 하늘을 연 장영실은 1442년 육순 안팎의 나이에 졸지에 태형 80대를 맞고 파면당해 궁에서 쫓겨난 뒤 행방이 묘연해진다.
그는 무슨 죄를 저질렀던가. 이천으로 온천요양을 떠나던 세종(이원희) 어가의 수레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제조를 책임진 이가 장영실(곽은태)이었다. 임금은 “책임을 묻지 말라”고 하지만 한양의 벼슬아치들은 어가의 제조와 감리를 책임진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역모에 준하는 국문(鞠問)을 연다.
연극은 혹독한 심문에 시달리는 장영실 일행과 그 밖에서 그들의 운명을 저울질하는 세종 대(對) 중신들의 정치 게임, 2개의 트랙으로 진행된다. 2층 구조 무대의 아래층이 실존의 공간이라면 위층은 정치의 공간이다. 여기서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의 제목, 궁리(窮理)의 의미는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주자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조선 땅에 적용한 세종과 장영실의 궁리(과학)다. 둘째는 그 장영실을 명나라 중심의 천하관과 사농공상의 신분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사대부들로부터 그를 구해내려는 세종의 궁리(정치)다. 셋째는 자신을 알아봐준 주군을 위해 내시 역할도 마다하지 않던 장영실의 궁리(성찰)다.
마지막 궁리는 “주군은 왜 내게 수레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세상 이치를 꿰뚫는 천문역법의 일을 그만두게 하고, 바퀴나 만드는 평범한 기술자로 자신을 주저앉히려 한 세종의 본심을 읽어내는 것이다.
결국 세종은 장영실의 목숨은 구하지만 자신을 비와 바람과 물을 다스리는 국조 단군의 위상에 올려놓은 만고의 충신은 영영 잃고 만다. 옥사(獄事)에서 장영실이 임금의 별만 바라보던 ‘도구적 인간’에서 스스로 별이 되길 꿈꾸는 ‘욕망하는 인간’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란 것이 이윤택의 해석이다.
중세적 인간 세종과 근대적 인간 장영실을 대립 구도로 풀어낸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급경사면을 빚어내는 널빤지와 완만한 목조 비탈길로 구성된 대형 무대와 한 덩이가 돼 움직이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장관이다. 조선의 별자리를 담은 천상열차분열지도를 아름답게 투사한 조명과 음악은 아름답다. 2막에 비해 1막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점과 세종의 존재감이 다소 사변적으로 흐른 점은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 i :: 장영실 역으로 강학수 씨가 번갈아 출연한다. 5월 13일까지 서울 용상구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 민호극장. 1만∼3만 원. 1688-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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