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복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무대에서 익히 봐왔던 모습과 달리 젊어 보여 기자를 놀라게 했다. 젊어 보이는 외모에 비해 실제로는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놀랐다. 요즘 연극계에서 연기파 배우로 각광받으며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중견 여배우 강애심 씨(49)다.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지난 8일 막을 내린 '878m의 봄'에서 탄광촌을 지키며 삽겹살 식당을 운영하는 맹여사 역할을 했던 그를 최근 남산예술센터 카페에서 만났다.
요즘 출연작이 굉장히 많다는 기자의 얘기에 "지난 해 말 연극 '빨간시'부터 시작해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극단 고래의 창단 공연인 '빨간시'에서 경상도 출신 종군위안부 할머니를 맡아 실감나는 경상도 사투리로 열연을 펼친 강 씨는 올해 들어서도 연극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에서 박판례 할머니를 연기했고 낭독 공연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관객 참여형 춤 공연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에도 출연해했다. 다음달 2일부터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헤다 가블러'에서 주인공 헤다(이혜영)의 시고모 율리안네를 연기한다. 7월에는 연극 '울지 말고 노래해'에 출연하는 등 올해 스케줄은 빈틈을 찾을 수 없게 빽빽하다. 이 모든 작품이 오디션 한번 보지 않고 캐스팅됐다. 오디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연기력이 검증됐다는 얘기다.
"요즘이 최고 전성기라고 생각하지만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상은 좀 받았어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했죠. 6살 때는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공연을 보고 나서 거기 나온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지요."
알고 보니 타고난 연기파 배우다. 지난해 연극 '연변엄마'에서는 연변 사투리, '빨간시'에선 경상도 사투리, '878m의 봄'에선 강원도 사투리를 사실적으로 구사해 고향을 물었더니 뜻밖에도 서울이었다. 사투리로 연기하는 것은 연변엄마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28세 때 연극 '칠산리'에서 간난이 역할로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상(현재는 폐지)을 받았고 30세 때인 1993년 연극 '귀천'에서 천상병 시인의 부인 역으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았다.
강 씨는 집안 사정상 원했던 연기 관련 학과를 못 갔지만 1981년 동남보건전문대 유아교육과에 입학하자마자 극단 '믈뫼'에 입단해 일찍부터 공연계에 발을 디뎠다. 1986년 우연히 라디오에서 민중극단이 뮤지컬 '캬바레'에서 출연할 배우를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오디션 본 뒤 민중극단 단원이 됐다. 민중극단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뮤지컬을 무대에 올린 민간 극단. 대학 졸업 뒤에는 낮에는 유치원 교사, 밤에는 공연을 하는 '이중생활'도 2년 넘게 했다.
하지만 배우 초년생 때부터 보인 뛰어난 연기와 작은 키가 주역 배우로 성장하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뮤지컬을 주로 올렸던 이유로 민중극단 여배우들은 대부분 키가 크고 늘씬해 극 중 나이 든 역할은 강 씨가 도맡았다는 것.
"민중극단 입단한 직후에는 키가 작다보니 어린이 공연을 도맡았어요. 성인 연극에서는 '하녀 전문 배우' '할머니 전문 배우'가 됐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유모, 춘향전에서는 향단이 등 하녀, 할머니 역할을 제가 또 도맡았거든요. 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데 어쩌겠어요."
1997년 강 씨는 대학로와 교류가 거의 없던 서울시극단으로 옮기면서 대학로에서는 점점 잊혀진 배우가 됐다. 그의 존재를 다시 알린 것은 2009년 김동현 씨가 연출한 연극 '다윈의 거북이'에 출연하면서다.
"1980년대 초 하희라, 송승환 씨와 같이 출연한 연극이 있었어요. 그 때 제가 유모 역을 했는데 연기가 좋았던지 그걸 본 김동현 씨가 저를 기억하고 있다가 '다윈의 거북이'에서 주인공인 거북이 역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지요. 전 좀 대사가 긴 역할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런 역이 갑자기 주어져 좋았죠." 찰스 다윈의 거북이 '헤리엇'이 200년 동안 살면서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가상 이야기를 다룬 이 연극은 강 씨에게 그 해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 김동훈 연극상을 안겼다.
연극 '헤다 가블러'에서 배우 경력 30년 만에 처음으로 귀족을 연기해 너무 설렌다는 강 씨는 "더 늦기 전에 여성성을 한껏 드러내는 역할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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