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사랑의 진면목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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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신유경. 그림 제공 포털아트
속삭임-신유경. 그림 제공 포털아트
늦은 오후, 커피전문점에 여성 몇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중심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 여성이 앉아 얘기를 하고 나머지 네 명의 젊은 여성이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사제지간인 것 같았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조용히 차를 마시며 백발의 선생이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는 말을 조용히 귀담아듣고 있었습니다. 커피숍에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백발 선생의 차분한 어조는 늦은 하오의 잔광을 타고 잔물결처럼 주변으로 번져갔습니다.

“사람은 평생 사랑을 갈망하면서 세상을 살아요. 하지만 사랑은 하지 못해도 괴롭고 해도 괴로운 거예요. 사랑을 못하면 외롭고 고독하다고 징징거리고 사랑을 하면 상대방과의 문제 때문에 괴롭고 힘들어져요. 그리고 모든 사랑은 종내 이별로 끝나요. 인간은 죽음을 전제로 세상을 살아야 하니 이별하지 않는 사랑은 존재할 수가 없는 거죠.”

“선생님, 그래도 사랑이 있으니까 세상이 살 만한 거 아닌가요? 그런 마음의 위안이라도 없으면 세상이 너무 삭막할 것 같아요.”

“위안은 잠시 잠깐의 일이니 그것이 걷히고 나면 위안을 받지 못할 때보다 더 허망해져요. 사람이 가장 사람답지 못할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때 사람은 가장 비이성적인 상태가 되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무서운 것은 그것의 이면에 미움과 증오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던 사람들이 헤어질 때 보이는 미움과 증오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도 다른 가족에 대한 미움과 배타성을 이면에 숨기고 있죠. 내 나라, 내 민족에 대한 사랑도 역시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에 대한 미움과 배타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죠. 그러니 독립적인 의미에서 사랑이란 사뭇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거예요.”

“사랑에 그렇게 무서운 요소가 담겨 있는 줄 예전에는 몰랐는데…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사랑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백발 선생의 견해를 듣고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막연하게라도 사랑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사는 사람이 많지만 그분처럼 딱 부러지게 사랑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이면을 간파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절대시하지만 그 이면에 다른 존재와 대상에 대한 미움과 배타성이 숨어 있다는 지적에는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번뇌가 애욕(愛慾)에서 비롯된다는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인간관계를 좌우하는 모든 척도는 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은 것이니 인간세상의 모든 아우성은 다 사랑(愛)과 욕망(慾)의 무대 위에서 빚어지는 미움과 증오의 이전투구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리가 파하기 전,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은 오직 한 가지가 있다고 백발 선생은 덧붙였습니다. 제자들이 귀를 세우고 일제히 선생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죠”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바깥에서 평생 사랑을 찾아 방황하며 상처받지 말고 자기 내면에서 참다운 사랑의 진실을 발견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자기 안에서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그 에너지로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그 넘침으로 타인들의 삶에 훌륭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전언,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인상 깊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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