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계의 영원한 스승 박외선 여사를 추모하며

  • 동아일보

선진무용 도입해 후학양성에 헌신
꺼지지않는 예술혼 가진 ‘뜰의 소녀’

한국 현대무용의 대모이며 시인 마종기 씨의 모친이신 박외선 여사(사진)가 3일 미국 시카고의 자택에서 96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신문 보도로 접했다. 그분과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 가르침과 인간적인 감동이 그분을 영원히 추억하게 한다. 햇병아리 대학 신입생에게 즉흥적인 동작을 보여주며 웃으시던 스승의 모습이 얼마나 감탄스러웠는지를 기억하며 그 무용 인생의 아름다운 에피소드들을 떠올린다.

선생님의 무용에 대한 열정은 마산여고 3학년 때 신문에 실린 알렉산드르 사하로프의 ‘뜰의 소녀’ 사진을 보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뜰의 소녀’의 청아한 이미지가 그의 무용 세계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조선의 최고 무용수였던 최승희 무용공연을 보고 그는 무용가의 길을 선택하는 결심을 한다. 서울로 올라와 최승희의 추천으로 일본 도쿄의 다카타 세이코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4년 동안 발레와 현대무용을 배우고 일본 전문학교의 무용강사가 되었다. 1935년 도쿄에서 제1회 창작무용 발표회를 가진 이래 10년간의 일본생활을 통해 다양한 무용 형태를 도입하며 활발한 무용의 꽃을 피워냈다.

1937년 당시 도쿄에서 활약하던 무용가 조택원의 창작발표회에 찬조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에서 월간지 사장 겸 문예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마해송 선생과 만난다. 마 선생님과 결혼 후 고국에 돌아와 1953년부터 1976년까지 23년간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육완순, 홍정희, 서진은 같은 무용가들을 후학으로 길러냈다.

그는 미국의 ‘마사 그레이엄’ 현대무용연구소에서 강습을 받은 후 1962년 국내에 이를 소개했고 1963년 처음으로 이화여대에 무용과를 신설했으며 그해 국내 최초의 무용이론서인 ‘무용개론’을 출간하였다. 그는 자신이 무용가보다는 ‘새싹을 잘 키우는 거름’으로서의 교육자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였다. 당시 모든 발표회에 자신의 이름보다는 제자들의 이름을 앞세웠고, 1977년 퇴직하실 때 받은 퇴직금도 장학금으로 기증하실 만큼 후배 양성에 깊이 마음을 쓰셨다.

1974년도 문예진흥원 후원으로 열린 창작발표회는 1부 ‘대지의 무리들’과 2부 ‘고별’로 나뉘어 단순히 무용을 위한 주제가 아니라 그의 삶과 역사가 실려 있는 체험의 미학이자 혼의 울림이라는 평을 받았다. 1977년도 이화여대 강당에서 공연된 창작무용 ‘생명의 곡’은 고국을 떠나기 전의 고별공연으로서 특히 의미가 깊었다. 현실과 이상, 지상과 천상, 고통과 환희의 대립을 초월적 의지로 극복하고자 하는 성스러운 기원이 이루어낸 작품이었다.

1977년 2월에 도미하여 1972년도에 머스 커닝햄과 같이 공부했던 인연으로 톨레도대에서 한 학기 발레를 가르치고 1978년 귀국해 청주사대에서 후학을 길렀다. 1981년 다시 도미해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해 발레와 모던댄스를 지도하며 새로운 무용인생을 개척했다. 선생님은 ‘예술은 곧 자신의 삶의 과정일 뿐이다’라는 삶의 철학을 항상 말씀하며 가르치고 또한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62년부터 10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국제무용교육자 세미나에 참석해 해외 무용계의 새로운 방향을 공부했고 그 배움을 국내 무용계의 발전에 헌신하는 데 사용했다. 2003년 보관문화훈장을 한국정부로부터 받음으로써 그분의 진정한 예술혼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해외에서 선생님과 함께 우연히 본 찬란한 무지개는 영원한 ‘뜰의 소녀’ 박외선 선생님의 꺼지지 않는 푸르른 꿈이었으리라.

허영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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