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12>무상급식 찬반논쟁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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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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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효율만 따지다 아이들에게 줄 사랑을 잊은 건 아닌가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눈이 내리면 포근하다는 말은 거짓인가 보다. 연일 계속되는 눈에도 불구하고 겨울바람은 매서움을 삭일 줄 모른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도 끊어진 지 오래다. 아이들이 잠을 뒤척이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다 어머니는 문득 부엌 찬장에 있는 서리태가 생각났다. 군불을 이용해 서리태를 볶아 방에 들어오자 잠이 든 척 눈을 감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일어나라. 콩 좀 먹고 자야지.” 말을 떼기 무섭게 아이들은 벌떡 일어나 모이통에 모여든 닭처럼 정신없이 콩을 입에 넣는다. 얼마 뒤 콩이 떨어져가자 아이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으레 반복되곤 하는,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한 갈등이다. 그러다 큰아이가 정신을 차린 듯 어머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엄마도 어서 좀 먹어. 아주 고소해.” 그렇지만 어머니는 대답 대신 흐뭇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서리태로 인해 벌어진 한밤중의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 것이며 아이들은 가장 행복한 얼굴로 잠이 들 것이다. 가난하고 남루한 삶, 그리고 맹렬한 겨울 눈보라를 잊게 만드는 흐뭇한 풍경이다.

최근 무상급식과 관련된 논쟁이 복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표면적으로는 그 누구도 복지 정책을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견을 달지 않고 있다. 단지 논쟁자들은 지금이 복지 정책을 확대할 시점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복지 정책은 정부가 거두어들인 세금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이다. 복지 정책 확대를 반대하는 논객들은 다른 정책에 투여하면 전체 사회에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세금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소비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반면 복지 정책 확대를 옹호하는 논객들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주어도 될 정도로 이제 국가 재정이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빵이 충분히 커지지 않았으니까 아직 분배할 때가 아니라는 주장과 조금 잘라 사회적 약자들을 먹여도 될 정도로 빵이 충분히 커졌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다. 어느 주장이 옳은지 따지는 것은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어느 주장이든 간에 인간보다는 효율성의 논리를 그 저변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차가운 눈보라를 무색하게 하는 어느 남루한 시골집이 보여주는 흐뭇한 광경에는 효율성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잊지 말자. 복지 정책 확대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논객 어느 쪽이든 효율성의 논리에 따라 가족을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아빠가 돈을 충분히 벌지 못했다. 그런데 아빠는 내일 일하러 가야 하잖니? 너희들은 배가 고파도 조금 참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어도 참아라. 아빠가 잘 먹고 경비를 잘 활용해야 우리 집은 부유해질 수 있으니까 말이야. 조금만 기다려라”라거나 “이제 아빠는 충분히 돈을 벌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너희들은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도록 해라. 지금까지 아빠를 믿고 기다려주어서 고맙구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아버지가 있기라도 할까? 이제 우리는 지금 전개되는 복지 논쟁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를 직감하게 된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보는 감수성이다.

돌아보면 한때 동아시아 사람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보려 했다. 그것은 가족 성원들이 서로를 아끼는 것처럼 사회 구성원들도 서로를 사랑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사랑을 낭만적 슬로건이라고 폄하하는 지적 분위기 속에 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양의 정치철학 전통을 모던한 것으로 맹목적으로 수용한 결과인 듯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강조했던 토머스 홉스(1588∼1679)든 인간 사이의 합리적인 계약을 강조했던 장자크 루소(1712∼1778)든 간에 서양 사유의 전통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존재라고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복지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논객은 직간접적으로 이런 서양 정치철학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어느 입장을 선택하든 우리 논객들이 공동체에 있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쉽게 간과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는 기철학(氣哲學)☆을 표방한, 위대한 형이상학자 장재(張載·1020∼1077)의 이야기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하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고 땅을 나의 어머니로 부르며, 나는 이처럼 미미한 존재로 아득하고 광대한 천지에 태어나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배를 타고난 가족이며, 만물은 모두 나의 동료이다.… 천하에 피곤하고 고달프며, 병들고 불구인 사람, 그리고 부모나 자식,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형제들 중에 넘어져 고통스러우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정몽·正蒙’)

장재의 주장은 인간만을 주체로 사유하려는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스케일을 자랑한다. 그는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을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그가 단순히 하나의 세계관을 피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이런 세계관을 피력한 이유는 뒤 구절을 보면 분명해진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 나아가 현대인들에게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회의 약자들을 ‘넘어져 고통스러우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형제들’로 볼 수 있는 감수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이다.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가족이라면 우리는 과연 나는 이만큼, 너는 저만큼 가져야 한다는 분배의 논리를 관철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 가진 근본적인 힘이다. 사랑은 분배와 관련된 계산적 합리성을 넘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은 말했던 것이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다. 그것을 일방적인 구호나 쇼맨십으로 오해하는 짐승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입으로 먹는다. 그리고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난 뒤 찌꺼기는 항문을 통해 배설한다. 너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어서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다. 누군가 배고픈 사람이 있다. 그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면 나는 그만큼 배가 고프고 반대로 그는 먹은 만큼 배가 부를 것이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산수다. 복지와 관련된 논쟁에는 산수로 작동하는 효율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에 참여한 논객들은 배고픔과 배부름을 계산하여 누구에게 먹이는 것이 더 효율적인지를 예측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이런 계산적 합리성의 논리에 반대되는 힘을 가진 것이다. 배가 고픔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먹을 것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어머니를 보라.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주 추운 겨울밤 자신이 가진 외투를 애인에게 벗어주고는 이를 부딪치며, 걱정하는 애인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라. 자신의 애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써 모은 전 재산을 보육원에 기탁하는 어느 할머니를 보라.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 찾아오는 가난함처럼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 그렇지만 세속적인 가치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성복 시인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계산적 합리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사랑이란 일방적 구호나 쇼맨십이라고, 한마디로 사랑은 실현 불가능한 슬로건에 불과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마침내 우리가 사랑을 모르는 동물, 즉 짐승이 되는 순간이다. 약한 사람을 보살피고 강한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는 사랑의 논리가 힘을 잃는 순간, 우리는 약육강식이란 짐승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해야 한다’는 시인의 생각을 너무 심각하게만 받아들이지는 말자. 이제 우리는 알지 않는가? 무엇인가를 축적했을 경우에 찾아오는 행복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어서 발생하는 가난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랑만 있다면 콩 한 조각이라도 쪼개어 먹을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법이다. 불행히도 이 작은 진실이 복지 논쟁을 주도하고 있는 논객들의 마음속에서는 증발한 것처럼 보인다. 김수영(1921∼1968)의 절박한 외침이 떠오르지 않는가?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강신주 철학박사

기철학(氣哲學)☆

만물을 기(氣)라는 유일한 실체(substance)의 다양한 양태(mode)로 이해하려는 동아시아 특유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말한다. H₂O를 실체라고 한다면 H₂O가 적정한 온도에서 드러나는 얼음, 물, 수증기 등이 바로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장재는 기를 물로 비유하고, 만물들을 물이 얼어서 만들어진 다양한 모양의 얼음이라고 비유했던 적도 있다. 이런 세계관을 피력했기 때문에 장재는 세계의 모든 것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장재나 왕부지(王夫之·1619∼1692), 조선시대 서경덕(徐敬德·1489∼1546)과 최한기(崔漢綺·1803∼1877)가 기철학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이성복 시인☆☆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시단을 빛내고 있는 세 명의 걸출한 시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황지우, 김정환, 그리고 이성복 시인이다. 김정환 시인이 남성적인 시인이라면 이성복 시인은 여성적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시인이 바로 황지우 시인이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은 각각 사회 참여적인가, 아니면 개체의 내면에 집중하는가를 상징한다. 특히 2000년 이후 우리 젊은 시인들의 모천(母泉) 노릇을 했다는 점에서 이성복 시인은 김수영 시인에 필적할 만한 위상을 갖고 있다. 수직적인 가족질서를 극복하는 수평적인 사랑세계를 보여주려는 집요한 노력이 이성복 시인의 시세계를 특징짓는다. 시집으로 ‘남해금산’ ‘그 여름의 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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