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1932∼2006)의 5주기가 되는 해. 그의 기일(1월 29일)을 맞아 백남준의 유분이 안치된 서울 삼성동 봉은사를 비롯해 경기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추모제가 열렸고 용인의 한국미술관과 서울의 아트링크갤러리는 백남준 관련 전시를 마련했다.
각종 행사가 이어지고 있지만 요즘 미술계에선 ‘백남준 미술’의 앞날을 우려하는 한숨 소리가 깊어지고 있다. 세계 현대미술의 지형도에 그의 좌표를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한 실질적 노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예술적 위상에 걸맞지 않게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작품이 호응을 얻지 못하고 저평가되고 있는 점은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지금까지 경매시장에서 백남준 작품의 최고가 기록은 약 6억 원에 불과하다. 아시아 근대미술품이 100% 낙찰되는 진기록을 남긴 2010년 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선 ‘한국 작품의 간판’ 격으로 앞세운 백남준의 ‘가상의 금성을 향한 로켓’이 5m 규모의 대작임에도 낮은 추정가를 맴돌다 가까스로 4억4000만 원에 낙찰됐다. 같은 경매는 아니지만 중국의 40대 작가 쩡판즈는 100억 원대에 이르는 경매기록을 갖고 있으며 그와 동세대인 장샤오강, 웨민쥔 등도 주요 작품이 점당 10억∼30억 원에 판매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백남준 작품이 얼마나 헐값에 거래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백남준의 ‘다다익선’. 미술계 인사들은 “새로운 사조를 창시한 그의 작품세계 연구와작품 관리를 위해 국가와 기업, 국민이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동아일보 자료사진(왼쪽), 백남준은 세계적 거장임에도 한국의 무관심 속에 국제 미술시장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 중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라이트 형제’는 2007년 11월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54만 달러에 낙찰됐다.(오른쪽) 표미선 한국화랑협회장은 “집에서 자기 자식을 귀하게 여겨야 밖에 가서도 사랑받는 게 아니냐”며 “한국 컬렉터들이 자국 출신 거장을 외면하는데 외국 컬렉터가 굳이 백남준 작품을 찾고 아끼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표 회장은 “일본에선 프랑스로 귀화한 레오나르도 후지타의 그림을 끊임없이 사들여 세계적 작가가 되도록 만들었다”며 “컬렉터 층이 두껍지 않은 현실에서 기업에서라도 그의 작품을 사들이거나 해외 미술관에 기증할 수 있도록 혜택을 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월드스타가 작가적 명성에 합당한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또 다른 한국 작가들이 경쟁력을 갖고 커 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의 지명도에 비해 작품 가격이 낮은 이유로 비디오 작품의 특성상 유지 보수의 어려움을 꼽기도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작품을 체계적으로 관리 보수하고 장기적 안목에서 연구할 기념사업회 같은 주체가 필요하며 이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전 세계적으로 모바일 시대가 열리고 ‘참여’ ‘임의 접속’ ‘네트워킹’ 등 백남준이 반세기 전 예견한 일들이 일상화되고 있다”며 “이제 백남준의 시대가 왔는데 한국에서 백남준을 감당 못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관장은 “국제적 성격을 가진 기관을 만들어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한편 국가적 차원에서 붐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백남준을 기리는 데 중요한 것은 외형적 작품 관리뿐 아니라 그의 미학을 형성하는 뿌리를 미술사적, 미학적 측면에서 연구하고 집대성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정준모 국민대 초빙교수는 “한국 출신의 세계적 작가라고 얘기만 했을 뿐 우리가 백남준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며 “지금부터라도 백남준 작품에 더 큰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학준 서울옥션 대표도 “미국이 추상표현주의를 전략적으로 지원했던 것처럼 미술은 국가 브랜드 구축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며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사조를 개창한 백남준은 정보기술(IT) 강국과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의 문화 이미지를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아티스트란 점에서 국가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계미술사에 혁명을 일으킨 백남준. 그의 존재가 너무 빨리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고민할 때다. 한국의 무관심 속에 그는 세계적 아티스트의 자리에 우뚝 섰지만 이제부터 우리가 백남준을 아껴야 할 때다. 21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그의 이름이 영원히 빛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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