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묻어난다, 거칠지만 단단한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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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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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PKM트리니티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불 씨의 작품전은 유리 크리스털 알루미늄을 소재로 한 조각과 함께 2001년 이후 10년간의 작업에서 고른 드로잉을 다수 선보였다. 작품의 밑바탕이 된 드로잉과 아이디어 스케치를 망라한 전시는 작가가 자신의 구상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진 제공 PKM트리니티갤러리
서울 PKM트리니티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불 씨의 작품전은 유리 크리스털 알루미늄을 소재로 한 조각과 함께 2001년 이후 10년간의 작업에서 고른 드로잉을 다수 선보였다. 작품의 밑바탕이 된 드로잉과 아이디어 스케치를 망라한 전시는 작가가 자신의 구상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진 제공 PKM트리니티갤러리
《“화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으세요? 그러면 드로잉을 보세요.” 서울 송파구 방이동 소마미술관에서 11월 21일까지 열리는 ‘한국드로잉 30년: 1970∼2000’전을 기획한 양정무 씨(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첫마디였다. 전시장을 함께 돌아보며 그는 “드로잉이란 작가의 마음이 가장 많이 담긴 미술”이라며 “완성된 작품의 매끄러움은 없을 수 있으나 순수함과 창작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설명했다. 작가 70명의 작품 300여 점을 선보인 전시는 역대 최대 규모의 드로잉전으로 한국 현대미술 30년의 발자취를 드로잉이란 매체로 재구성한다. 스케치나 밑그림을 뜻하는 전통적 의미의 드로잉을 넘어 삽화부터 산업드로잉과 멀티미디어 드로잉까지 생각과 의도, 그 결과로 표현된 작업을 두루 품어낸 학구적 전시다. 02-425-1077》
현대 미술은 창작의 결과보다 과정을, 기술보다 의도와 개념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에 따라 작업의 보조수단에서 독립된 작업으로 지위가 바뀐 드로잉을 주목한 전시가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PKM트리니티갤러리에서 10월 15일까지 열리는 이불 씨(46)의 작품전도 작가와 교감하는 길로서 드로잉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기회다. 02-515-9496

○ 생각의 실험실

‘한국 드로잉 30년’전은 ‘한국의 실험미술 드로잉 1,2,3’ ‘이미지의 소멸과 부활’ ‘드로잉 한국현대사’ ‘생각하는 드로잉’ 등 시대와 주제별로 6개의 전시실로 구성된다. 실험미술 드로잉의 경우 시곗바늘을 되돌려 세대별로 청년작가의 감수성을 들여다본다. 첫 출발은 미술의 현대화를 고민했던 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연필을 깎은 뒤 선을 한 번 긋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 김차섭 씨의 ‘선 하나’는 반도체 회로를 연상시킨다. 이와 함께 백남준 성능경 이승조 전혁림 김창렬 씨의 드로잉도 새로운 감수성을 실험하거나 전통을 재해석한 작업으로 조명된다.

197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발자취를 드로잉이란 매체를 통해 재조명하는 ‘한국 드로잉 30년’전에 나온 전수천 씨의 ‘무빙 드로잉 프로젝트’. 이번 전시에서 전통적 드로잉을 뛰어넘어 산업드로잉과 멀티미디어드로잉 등에 이르기까지 드로잉이 가진 무한한 세계를 살펴본다. 사진 제공 소마미술관
197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발자취를 드로잉이란 매체를 통해 재조명하는 ‘한국 드로잉 30년’전에 나온 전수천 씨의 ‘무빙 드로잉 프로젝트’. 이번 전시에서 전통적 드로잉을 뛰어넘어 산업드로잉과 멀티미디어드로잉 등에 이르기까지 드로잉이 가진 무한한 세계를 살펴본다. 사진 제공 소마미술관
1990년대 이후 작품 중 김호득 유근택 씨가 선보인 드로잉 개념의 수묵작업에선 한국 회화의 전환점을 엿보게 한다. 전수천 씨가 2005년 미국 대륙을 캔버스 삼아 흰색 방수천으로 감싼 기차로 횡단하는 무빙 드로잉 프로젝트는 드로잉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미술의 보수성에 저항하는 실험적 드로잉으로는 박이소 씨의 ‘미술 그림’ 연작을 소개했다. 현대미술사 책의 한 장씩을 지우는 과정이 담겨 있다. 현대중공업의 1호 선박 ‘아틀란틱 바론’의 설계도면과 1970년대 아파트 주거공간을 분석하는 도면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순간을 되돌아보는 작업으로 재해석되면서 미술관에 걸렸다. 이 밖에 유영교 최욱경 육태진 오윤 씨처럼 작고 작가를 조명한 드로잉도 눈길을 끈다.

소주제만으로도 개별 전시가 가능한 격동의 시대를 한 전시로 소화하겠다는 벅찬 야심이 숨 가쁜 호흡을 드러내지만 드로잉의 폭넓은 세계와 한국 미술의 지형도를 엿보는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전시다.

○ 고뇌의 흔적들


내년 11월 일본 도쿄의 모리미술관 전시를 필두로 세계순회전을 시작하는 이불 씨. 그의 조각과 다수의 드로잉을 선보인 전시는 완성작이 나오기까지 이어지는 작가의 고뇌, 구상을 풀어내는 작가의 접근방법을 솔직담백하게 드러낸다.

2007년 파리 전시에서 선보였던 ‘나의 거대한 서사’를 위한 드로잉 세트를 포함해 최근 10년간 작업에서 고른 드로잉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연필, 잉크, 아크릴물감, 크리스털 등 소재도 다양하다. 깨알만 한 글씨로 작품 크기와 설치방법을 써넣거나, 재료를 놓고 고민한 흔적이 담겨 있어 쉽게 접하기 힘든 작가의 속내를 읽게 된다. 이런 드로잉이 모여 설치 작품을 위한 개념은 구체화되고 공간에 대한 성찰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좋은 드로잉에는 풍부한 표정과 이야기가 녹아 있다. 또 좋은 작가는 수준 높은 드로잉을 통해 알아본다고 한다. 작가의 감성과 역량을 오롯이 드러낸 드로잉을 감상하는 재미는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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