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본 이 책]어둠 뚫는 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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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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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계속 전진
잿빛 미래란 없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매트 리들리 지음·조현욱 옮김/624쪽·2만5000원/김영사

《희망은 있나요? 현실을 비판하는 강의 끝에 꼭 나오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종종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머리로는 냉정하게 세상을 직시하면서 가슴으로는 꿈을 꾸자고. 이성적으로는 비관주의로 갈 수밖에 없지만 상상력과 열정으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가자는 제안이다.》
매트 리들리는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이러한 통념에 도전장을 던진다. 책 제목 그대로 이성적으로도 낙관주의의 근거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자 한다면 냉철한 머리로 정밀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려 600쪽이 넘는 이 책에는 방대한 자료들이 인용되고 있다. 그 대부분은 다른 학자들의 견해가 아니라 객관적인 데이터다. 아득한 구석기시대부터 동서양의 역사와 현대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비교동물학에서 환경공학과 경제학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명료하다. 인류는 숱한 난관과 위기에 부닥쳤지만 꾸준하게 번영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이다.

물론 지구촌을 둘러보면 끔찍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쟁과 고문, 기아와 장기 매매, 대규모 자연 재해…. 저자는 그러한 현실에 결코 눈을 감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인 눈으로 보자고 주문한다. 비참한 세계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과연 예전보다 더 나빠졌는가? 그리고 점점 악화되고 있는가? 옛날은 좋았다는 막연한 노스탤지어에서 깨어나자고 하면서 평균 수명, 영양 상태, 일상 속의 폭력, 아동의 인권 등에 관한 다양한 사료를 근거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의 조건을 개선해온 비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교환과 협동을 통한 끊임없는 혁신이다.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핏줄이 섞이지 않은 타인과 기꺼이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개체와 소집단의 약점을 극복해 왔다. 자급자족으로는 궁핍을 면할 수 없지만 과감하게 경계를 넘어 다른 집단에 접속해 교환하고 분업하면서 고도의 지적 능력과 사회적 시스템으로 풍요를 일궈온 것이다. 교역은 문명이나 농업보다도 선행하는 위대한 발명품이었다고 저자는 증언한다.

인류 문명의 수수께끼는 커다란 두뇌에서 비롯됐다고 흔히 이야기된다. 그러나 리들리는 두뇌와 두뇌 사이에서 일어나는 집단 지능에 열쇠가 있다고 말한다. 근대 사회 이후, 그리고 20세기에 접어들어 그 성능은 놀랍게 업그레이드돼 왔다. 그 결과 노동생산성과 에너지 효율이 가파르게 신장됐고 생활의 제반 여건이 크게 개선됐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디어의 네트워크가 범지구적으로 확장되고 복합화되면서 앞으로 혁신은 더욱 숨 가쁘게 진행될 것이고 삶의 질도 점차 향상될 것이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이러한 진단과 전망은 우리 시대의 배경화면이 되는 여러 가지 비관적 시나리오와 충돌한다. 대량생산 및 소비의 무한한 경제 성장을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다가는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종말론적 시나리오는 상식처럼 통용된다. 리들리는 그러한 비관론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조목조목 파고든다. 인구폭발, 산성비, 기아, 수질오염, 생물 멸종, 자원의 고갈, 유전자조작 식품, 그리고 기후 변화 등 지금까지 심각한 징후로 여겨지던 현상들에 대해 실제로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거나 기술의 힘으로 상당 부분 극복돼 왔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각광을 받는 바이오에너지, 청정에너지, 유기농업 등에 대해서도 그러한 대안이 오히려 환경을 망치고 있다고 반박한다.

왜 비관주의가 득세하는가? 지식인 사회에서 낙관론자는 철부지 또는 기득권자로 여겨진다. 반면에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경고에는 비장함의 미학이 풍겨난다. 비판적 지식인은 염세론에 친숙하다. 저자는 그 자체가 엄청난 횡포라고 비판한다. 위험을 과장해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두려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무력감만 심어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생태주의의 이면에는 때로 추악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도 하다고 폭로한다. 환경운동에 헌신하는 이들에게 ‘불편한 진실’이 될 수도 있겠다. 과연 그러한 지적이 얼마나 타당한지 앞으로 치열한 논쟁이 기대된다.

물론 환경운동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절제의 미덕이 폐기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에 매몰되어 문명사의 장구한 흐름을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저자의 이성적 낙관론에는 기술 발전을 통해 끊임없이 혁신이 일어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자유로운 교환과 협동을 요구한다. 저자는 역사 속에서 문명을 정체와 파멸로 몰아넣은 주범으로 관료제와 부패, 사치, 전쟁, 자산 인플레이션을 지목한다. 특히 그는 21세기의 자본시장이 부가가치 창출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금융 사기꾼’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재화와 용역의 시장은 최대한 자유롭게 풀어놓되 자본시장은 세심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온갖 비극을 자아내는 주범은 결국 ‘탐욕’이다. 그것을 제어하는 기술을 아직 인류는 제대로 개발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혁신은 자연과의 게임에 국한된 문제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물학적 연명 이상의 욕망을 갖는다. 그 욕망은 추악한 탐욕으로 흐를 수도 있고, 창의성의 무한한 확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자연에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는 스스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인 시너지와 자원의 공유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책은 협동과 교환이 빚어낸 놀라운 드라마를 보여주면서 인류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신뢰를 되살리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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