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남도의 恨’ 새 시험대에 서다

  • 동아일보

뮤지컬 ‘서편제’
연기★★★☆ 노래★★★☆ 무용★★☆ 무대★★★

소리와 영상의 융합을 통해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펼쳐낸 영화의 내용을 한국가요의 정서적 문법으로 옮긴 K-Pop 뮤지컬 ‘서편제’. 왼쪽부터 송화 역의 이자람, 동호 역의 김태훈, 유봉 역의 서범석 씨. 사진 제공 피앤피컴퍼니
소리와 영상의 융합을 통해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펼쳐낸 영화의 내용을 한국가요의 정서적 문법으로 옮긴 K-Pop 뮤지컬 ‘서편제’. 왼쪽부터 송화 역의 이자람, 동호 역의 김태훈, 유봉 역의 서범석 씨. 사진 제공 피앤피컴퍼니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가 영화화됐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소설 속에선 관념으로만 다가서던 서편제 소리가 육화(肉化)돼 눈앞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중성을 거세당하고 생명력도 고갈돼 겨우 박제로만 추억되던 ‘희귀동물’의 경이로운 부활과 같았다. 그 부활을 가능하게 했던 게 바로 음악과 영상의 융합이었고, 그 매력적 촉매는 오정해라는 소리꾼이었다.

그 ‘서편제’가 영화화된 지 17년 만에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다.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였음에도 뮤지컬로 발효되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의 성공요인을 되짚어 보면 해답이 보인다.

첫째는 음악이다. 국악의 묘미를 한껏 살린 영화 속 음악을 어떻게 기존 국악무대와 차별화하는 방식으로 무대화하느냐에 대한 고민이다. 뮤지컬 ‘서편제’는 그 해답을 K-Pop(국제화한 한국가요)에서 찾았다. 국악이 펼쳐지는 장면을 제외한 곳에선 김범수의 ‘하루’와 이승철의 ‘오늘도 난’ 등을 작곡한 윤일상 씨의 록발라드풍의 노래가 채운다.

둘째는 영상이다. 로드무비 형식에 서편제와 하나 된 남도의 풍광을 담아낸 영상미를 어떻게 제한된 무대공간에 풀어낼 것인가. 무대디자이너 박동우 씨는 한지를 겹겹이 붙인 8개의 이동식 반투명막에 수묵화 또는 빗방울과 꽃 영상을 투사하거나 그 뒤에서 그림자놀이를 펼치는 방식으로 이를 구현했다. 또 원형 회전무대를 통해 길 위를 떠돌던 소리꾼의 운명을 형상화했다.

셋째는 판소리의 참맛을 구현할 소리꾼이다. 뮤지컬은 판소리를 토대로 다방면에서 맹활약 중인 이자람 씨를 택했다. 아비의 손에 눈이 머는 여주인공 송화 역을 맡은 이 씨는 영화 속 오정해 씨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극중 국악 장면의 선곡과 작창을 함께 맡았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배우뿐 아니라 국악 장면의 창작을 맡은 김명곤 씨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무대 위에서 역시 그는 최고의 선택임을 입증했다. 첫 뮤지컬 출연임에도 차진 노래솜씨뿐 아니라 극을 밀고 당기는 연기력도 단연 돋보였다. 해학적 남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관객을 웃기다가도 아버지 유봉(예술)과 남동생 동호(사랑) 사이에서 애절한 갈등을 연기하며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유봉 역을 맡은 서범석 씨도 묵직한 가창력을 토대로 국악과 가요를 노련하게 넘나들었지만 남도 특유의 끈끈한 정한(情恨)을 십분 살리진 못했다. 동호 역의 김태훈 씨는 폭발적 가창력에 비해 비중이 커진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연기력이 아쉬웠다.

윤일상 씨의 음악은 정서적 울림은 강했지만 귓가를 맴도는 친근함은 부족했다. ‘한의 소리’로서 송화의 판소리와 ‘분노의 소리’로서 동호의 록음악을 대비시키는 설정은 좋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음악적 역동성으로 풀어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회전무대와 영상을 활용해 이미지 구축에 주력한 이지나 씨의 연출은 한의 정서를 다소 도식적으로 풀어낸 감이 있다. 심리를 풍경에 투사하는 영화적 문법보다는 풍경을 심리 안에 녹여내는 소설적 문법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송화와 동호가 수십 년 만에 대면하는 마지막 장면의 시각효과는 영화를 능가하는 감동을 안겨준다. 상대가 동호임을 눈치 챈 송화는 ‘심청가’ 중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을 구성진 가락으로 뽑는다.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아비와 화해했으며 그 자신은 진짜 소리에 눈을 떴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송화와 동호를 번갈아 비치는 쇼트컷으로 진행된다. 뮤지컬에선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회전무대가 돌아가는 가운데 흰색 물방울 조명이 무대 전체에 쏟아져 마치 카메라가 360도 회전하는 트래킹 쇼트를 보는 듯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한국 뮤지컬’을 표방한 이 작품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지극히 한국적이다. 뮤직비디오 여러 편을 연결해놓은 듯한 음악과 춤, 비주얼을 강조하는 무대연출, 잘 짜인 이야기보다는 그 순간의 감정 표출에 충실한 장면구성, 연기보다는 가창력에 방점을 찍는 배우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한국 뮤지컬의 돌파구가 될지 걸림돌이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송화 역으로 차지연, 민은경 씨가 번갈아 출연한다. 유봉 역으론 홍경수 JK김동욱 씨가, 동호 역으론 임태경 씨가 교체 출연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7만7000∼9만9000원. 11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02-703-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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