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값, 中화가의 20배 주문 몰려 바쁠 땐 대충대충”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17일 03시 00분


장진성 교수, 작화방식 등 분석

그림 수요 ‘삼대밭처럼 무수’
사용한 붓 ‘무덤을 이룰 정도’

中에 가져가 되팔려는 이 많아
여든 나이에도 안경 쓰고 그려

정성껏 그린 ‘불정대’
정성껏 그린 ‘불정대’
“18세기, 겸재 정선의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매일같이 밀려드는 주문에 시달린 정선. 갑작스레 들어온 주문, 그리 중요하지 않은 주문에 대해선 빠른 붓질로 서둘러 대충대충 그림을 그렸다.”

18세기 인기화가 겸재 정선은 얼마를 받고 어떻게 다작을 했을까. 장진성 서울대 교수(미술사)가 최근 이에 답하는 논문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 방식’을 ‘동악미술사학’ 11호(동악미술사학회 발간)에 발표했다. 인기화가 정선이 매일매일 밀려드는 주문을 어떻게 감당하면서 그림을 그렸는지, 정선의 그림은 얼마에 팔렸는지를 추적한 논문이다.

정선에 대한 그림 수요는 ‘삼대밭처럼 무수’하고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 그림 주문이 너무 많아 분주하고 피곤한 날을 보내기 일쑤였다. 아들에게 그림을 대필시킬 때도 있을 정도였다.

장 교수는 정선의 대응 방식으로 휘쇄필법(揮灑筆法)과 권필(倦筆)을 들었다. 휘쇄필법은 한번에 쓸어내리듯 급히 휘두른 필묵법을 말한다. 장 교수는 18세기 이규상이 쓴 정선에 관한 글 가운데 ‘그림 요구에 응하여 종이와 비단에 붓을 쓸어내리듯 휘둘러 그린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는 문구에 주목한다. 휘쇄필법을 단순히 정선 산수화의 호방한 제작기법으로만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문에 대한 그의 대응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권필은 그림 주문이 너무 많다 보니 지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 방식을 말한다.

바쁘게 그린 ‘비로봉’  정선의 ‘불정대’(위)와 ‘비로봉’. 모두 정선 특유의 휘쇄필법으로 그렸지만 ‘비로봉’은 ‘불정대’에 비해 대충대충 그렸음이 드러난다. ‘비로봉’에 대해 장진성 교수는 “빠른 붓질로 금강산 비로봉을 표현했지만 현장감과 사실성이 결여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바쁘게 그린 ‘비로봉’ 정선의 ‘불정대’(위)와 ‘비로봉’. 모두 정선 특유의 휘쇄필법으로 그렸지만 ‘비로봉’은 ‘불정대’에 비해 대충대충 그렸음이 드러난다. ‘비로봉’에 대해 장진성 교수는 “빠른 붓질로 금강산 비로봉을 표현했지만 현장감과 사실성이 결여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정선은 어쩔 수 없이 주문을 받을 때,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그림을 그려도 될 때 이 같은 필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장 교수의 견해다. 그림 주문에 시달려 바쁜 일상 속에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 대충대충 그림을 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물론 정선이 늘 이렇게만 그렸다는 것은 아니다.

휘쇄필법과 권필에 대한 장 교수의 평가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장 교수는 “정선의 휘쇄필법의 경우 그림의 기운은 좋지만 거친 기운을 띠게 되었다. 초기에는 세부묘사에 충실한 진경산수(眞景山水)화를 그렸으나 인기를 얻고 주문이 몰리면서 대충 그린 형식적인 휘쇄필법이 많아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정선은 휘쇄법을 이용해 마(麻)를 찢어놓은 듯한 필선으로 금강산을 그렸는데 이것이 형식화 획일화되면서 진정한 진경산수를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천편일률적인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말로, 정선의 ‘비로봉’이 대표적인 경우다.

18세기 최고 인기 화가였던 정선의 작품은 중국에서 인기가 더 높았다. 정선의 큰 그림 하나는 중국에서 100∼130금에 팔렸다. 18세기 청나라 일급 궁정화가의 월급(11금)의 10배가 넘는 수준. 청나라 초 중국 화가들의 그림은 대개 6금 이하였다. 장 교수는 “정선의 그림 가격은 경이로운 수준으로, 정선의 그림을 사서 중국에 팔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으로 가는 역관이나 중인들을 위해 정선은 여든의 나이에도 두꺼운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