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신 PD의 반상일기]국가대표팀 선발전, 투혼의 한마당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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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칠갑을 한 18명의 동인(銅人)들이 차례로 앞을 막고 나선다. 그들이 버티고 있는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만 세상에 나가 정의를 펴고 이름을 떨칠 수 있다. 최정예 훈련을 거친 숱한 도전자들이 최종 관문을 앞두고는 줄줄이 쓰러져 간다. 하지만 주인공은 격파가 불가능해 보이던 무적의 동인진을 물리치고 활활 타는 청동화로를 감싸 들어올려 마침내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힌다. 영웅의 가슴엔 최고수의 표상인 찬란한 용 문신이 아로새겨진다.

어릴 적 열광했던 무협영화 ‘소림 18동인’의 이미지가 11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릴 아시아경기 바둑 국가대표 선발 과정 내내 떠올랐다. 남자팀의 경우 자동 출전권을 받은 이창호 이세돌 9단을 제외하고 광저우를 밟은 수 있는 기사는 단 4명. 대표 선발전 출전 자격은 랭킹 20위까지 주어졌다. 1차전부터 출전한 랭킹 13∼20위 기사가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서는 최소 18판, 최대 22판의 대국을 가져야 했다. 특히 1, 2차전에서는 거의 전승을 거둬야 했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하위 랭커 중에서 최종 통과자가 나오지 못했다. 박정상 9단, 윤준상 8단, 백홍석 7단이 눈부신 활약을 펼쳤지만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분루를 삼켰다.

‘죽을 때까지 강해지겠다’는 다짐을 승부사로서의 모토로 삼고 있는 박 9단은 “패한 순간 지나온 승부들이 떠올라 20분이 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블로그에 심경을 남겼다. 랭킹 15위로 출전해 강자들을 연파하며 박 9단과 함께 관문 돌파의 쌍벽을 이뤘던 백 7단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부담 없이 시작했는데 자꾸 이기니까 슬슬 욕심이 났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군 미필 동료 원성진 9단, 백 7단과 함께 선발전이 끝나면 회포를 풀기로 약속했던 윤 8단은 마지막 국가대표 선발에서 미끄러진 뒤 씁쓸한 뒤풀이를 가졌다.

이들의 아픔을 뒤로하고 사상 첫 바둑대표팀의 진용이 갖춰지고 있다. 남자팀은 이세돌 이창호 최철한 조한승 강동윤 9단, 박정환 8단 등 6명을 확정했다. 여자팀은 먼저 선발전을 통과한 이슬아 김윤영에 이어 이민진 조혜연 박지연 셋이 남은 두 자리를 놓고 막판 경합 중이다. 16일 대표팀은 첫 소집을 갖고 훈련에 돌입한다.

대표팀의 선전을 당부하기에 앞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온 모두에게 따듯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프로들의 철저한 직업의식이야 익히 보아왔지만 이번 선발전을 통해 새삼 놀란 대목은 바둑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열정이었다. 상금이 아니라 금빛 명예를 위해 젊은 사자들은 기꺼이 투혼을 불살랐다. 그들이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철의 관문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을 것 같다.

이세신 바둑TV 편성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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