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의 폭풍 앞에 인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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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신작장편 ‘은교’
老시인의 사랑-파멸 그려

사진 제공 문학동네
사진 제공 문학동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老) 시인이 갑작스레 본능의 폭발을 경험한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 시인이자 시 이외엔 잡문 한 편 써본 적 없을 만큼 평생 고고한 기품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갖고 살아온 그. 필명조차 ‘적요’인 그를 삽시간에 질투와 욕망이 이끄는 파멸의 나락으로 밀어뜨린 주인공은 평범한 열일곱 살 소녀다.

소설가 박범신 씨(64·사진)가 신작소설 ‘은교’(문학동네)를 냈다. 애당초 ‘살인 당나귀’란 제목으로 박 씨의 개인 블로그에서 연재됐던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하며 제목을 여주인공 이름인 ‘은교’로 바꿨다.

소설은 제자이자 베스트셀러 소설가였던 서지우를 자신이 죽였다는 이적요 시인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적요와 서지우,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놓인 은교라는 소녀. 이들 사이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진 작가는 “처음부터 끝 문장까지 폭풍 속에서 쓴 작품”이라고 말했다.

“연애소설로 기획했지만 다 쓰고 보니 이것이 과연 연애 소설인지, 예술가 소설인지, 생로병사에 내쫓기는 노인의 욕망에 관한 소설인지, 존재론적 소설인지 구획 짓기 어렵게 됐어요. 지금껏 소설을 쓰며 나를 괴롭혀왔던 오욕칠정의 문제들이 모두 융화돼 있고 나를 사로잡았던 여러 층의 욕망이 반영돼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말처럼 애정, 질투, 명예욕 등 실로 다양한 갈망의 향연이다. 살인 사건을 가로지르는 위태로운 삼각 로맨스는 빠르게 읽힌다. 여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이적요 시인의 육체적 쇠락과 아무리 노력해도 노 시인의 발끝조차 따라갈 수 없는 서지우의 문학적 절망이 덧입혀지면서 서사는 입체적으로 고조된다.

하지만 노시인과 중년 소설가의 갈등, 대립이 치열하게 그려진 반면 은교란 소녀는 판타지 대상으로 미화돼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은교는 아름다운 처녀인 동시에 새로 쓰고 싶은 수많은 소설들, 이루지 못한 꿈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며 “오히려 현실성이 결여된 모호한 상태 그대로가 의도한 바인데, 은교는 판타지적 존재인 동시에 관념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사회는 잘 정돈된 사회도 아니건만, 개인의 본능을 필요 이상으로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독자들이 이 소설을 통해 그들 내부에 도사린 오욕칠정, 본원적인 욕망을 함께 읽어나간다면 좋겠습니다.”

‘촐라체’를 연재하며 인터넷 연재시대의 본격적인 막을 올렸던 그는 이번 작품도 직접 제안해 전자책으로 동시 출간했다. 국내 작가가 신작을 종이책 출간과 함께 전자책으로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그는 “작가 입장에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며 “종이책과 전자책이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는 여러 화두를 만들어가야겠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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