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부르는 언어… 입 닫으면 오감 열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1일 03시 00분


조용한 흥행 종교다큐영화 ‘위대한 침묵’ 함께 본 미등 스님-안성철 신부

미등 스님(왼쪽)과 안성철 신부가 8일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기 위해 서울 종로구의 한 영화관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다. 스님은 신부에게 “인상이 좋다”고 덕담을 건넸고, 신부는 스님에게 “향기가 좋다”고 화답했다. 김재명 기자
미등 스님(왼쪽)과 안성철 신부가 8일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기 위해 서울 종로구의 한 영화관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다. 스님은 신부에게 “인상이 좋다”고 덕담을 건넸고, 신부는 스님에게 “향기가 좋다”고 화답했다. 김재명 기자
《알프스 산맥의 수도원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는 9일 현재 3만9000여 명이 관람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상영시간 162분짜리 종교 영화로서는 이례적이다. 무대인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영화 제목처럼 침묵이 지배하는 곳이다. 내 안의 나와 신성을 찾기 위해 몰두하는 그곳. 주위를 돌아보면 불교 사찰의 수행도 그곳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천주교 복음 전파를 위해 도서 발간 등의 소임을 맡은 서울 강북구 송중동 성바오로수도회 준관구장 안성철 신부(41)와 부산 범어사 등에서 참선 정진했고 현재는 불교문화재연구소 부소장을 맡아 문화사업에 열심인 미등 스님(48). 두 분과 함께 8일 오후 1시 반부터 영화를 관람하고 근처 찻집을 찾아 이야기를 나눴다.》

■ 미등 스님
외부현상 집착하다보니
자기 안의 목소리엔 소홀
사찰-수도원 닮은 점 많아

■ 안성철 신부
들으려 하지 않는 현대인
신에게 다가가려면
침묵의 언어 배워야


―영화 상영 시간이 꽤 길군요.

미등 스님=수행하는 마음으로 봤습니다. 졸지 않고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웃음)

안성철 신부=저는 많이 졸았습니다. 대사도 거의 없고 수도원이라는 낯선 소재의 영화를 끝까지 보신 스님이 대단하십니다.(웃음)

(영화관에는 간간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도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살짝 졸았다.)

―평일인데도 관람석이 꽉 찼습니다.

스님=사람의 마음속에 침묵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 같아요. 불가에서는 언어가 번뇌를 부른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본질의 그림자일 뿐이죠.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언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외적 지향만 추구하다 보니 자기 안의 목소리에 소홀했죠.

신부=맞습니다. 천주교에서도 언어의 비(非)본질성에 대해 지적합니다. 언어는 실재를 다루지 못합니다. 껍데기일 뿐이죠. 주말이면 신자들이 귀한 시간을 내 피정의 집을 찾습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세상에서 벗어나 생각을 정리)의 줄임말입니다. 여백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스님=수도원의 침묵은 언어의 침묵이자 공간의 침묵, 시간의 침묵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빽빽한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주위에 대한 자각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신부=천주교에서 침묵은 또 다른 언어를 의미합니다. 입을 닫는 순간 귀가 열리고 오감이 열립니다. 현대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환경 문제만 하더라도 자연의 소리를 외면한 결과입니다. 타인과 자연, 그리고 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침묵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수도원에서는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칠 때까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수행 중 특별한 경험이 있습니까.

신부=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사제품을 망설였습니다. 머리로는 신을 받아들였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40일 동안 대침묵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열이 나고 과거의 상처들이 안에서 용암처럼 끓더군요. 30일이 지나자 내 안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더군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참된 이치를 깨달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신을 경험한 순간이었죠.

스님=영화를 보면서 사찰과 수도원의 수행이 참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저도 출가해 처음 묵언수행을 할 때 환청이 들리고 어릴 적 상처들이 마음을 비집고 올라왔어요. 나중에서야 그것이 업을 멸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지막에 수도사들이 눈썰매 타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신부=그 장면에서 많이 웃었습니다. 수도자 생활이 좋아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저는 동료 수사들과 축구를 합니다. 잠도 스트레스 해소에 특효약이죠.

스님=수행을 많이 하면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영화 장면도 그런 뜻에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수행이 힘들 때면 저는 여행을 갑니다. 소임은 잠시 잊고 무작정 떠납니다.

―수도원과 사찰에 가 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스님=몇 년 전 우연히 서울 태릉 근처에 있는 성베네딕도회 수도원을 들른 적이 있습니다. 수사님들이 차와 함께 주머니에 있던 빗을 건네며 혹시 필요하시면 가져가라고 농담을 하더군요. 스스럼없이 대해줘 아주 즐거웠습니다.

신부=부모님이 모두 불자여서 어릴 때 절에 많이 갔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내 안에 불교문화가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문화사업을 담당하시는 분들로서 한국의 종교 문화는 어떤가요.

스님=기복적인 면이 강한 것이 문제입니다. 물질문명에 기댈수록 무언가를 더 바라는 기복신앙이 강세를 보입니다. 종교 문화는 의식 하나하나마다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종교 의례의 겉치레에만 치중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전달해야 종교 문화가 발전할 것입니다.

신부=신앙 관련 책을 내도 팔리지 않습니다. 신앙인들 중 70% 정도는 기복적인 면에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2시간 동안의 대담을 마치고 찻집을 나섰을 때 이미 해가 져 사위가 어두웠다. 안 신부는 미등 스님에게 명상에 관한 책을 건네고 “수사님들이 만드는 스파게티가 아주 맛있다”며 강북구 송중동 수도회에 초대했다.

미등 스님은 “칼국수를 더 좋아하지만 꼭 한번 들러 맛보겠다”고 웃으며 화답했다. 기자와 헤어진 뒤 두 분은 어둠 속으로 같은 길을 걸어갔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 ‘위대한 침묵’은

해발 1300m 알프스 산중에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침묵 수행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대사와 음악이 거의 없다. 필리프 그로닝 감독이 1984년 수도원 촬영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뒤 15년 만인 1999년에야 촬영 허락을 받아 화제가 됐다. 지난해 12월 3일 국내 개봉.


● 미등 스님은
1985년 충남 공주 마곡사에서 출가 뒤 조계종 총무원 기획국장을 거쳐 불교문화재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 중앙승가대를 졸업하고 고려대 문화재학과 민속학 박사과정 수료.

● 안성철 신부는
200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강북구 송중동 성바오로 수도회 7대 준관구장으로 일하고 있다. 수원가톨릭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 광고홍보 전문가 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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