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일제가 뜯어 팔기 전에는 경복궁 크고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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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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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우동선, 박성진 외 지음/332쪽·1만8000원·효형출판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쓴 책 ‘한국민에게 고함’에 게재된 흥화문. 경희궁의 얼굴이었던 흥화문은 이토를 기리는 ‘박문사’에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됐다. 사진 제공 효형출판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쓴 책 ‘한국민에게 고함’에 게재된 흥화문. 경희궁의 얼굴이었던 흥화문은 이토를 기리는 ‘박문사’에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됐다. 사진 제공 효형출판
중국 또는 일본의 고궁을 구경하고 나서 “한국의 궁궐은 소박하다”고 말하는 이가 간혹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방치됐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이 창건 때와 흡사하게 복구한 경복궁의 모습은 지금처럼 ‘소박’하지 않았다.

외세에 저항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한 대원군은 경복궁 내에 7200칸의 전각을 지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을 합하면 4000칸. 경복궁 터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한 터의 약 절반이다. 나라의 정궁(正宮)을 풍성하고 화려하게 고쳐 올려 근대적 군주의 위상을 갖추고자 한 것이다.

1907년경 만든 경복궁의 배치도면 ‘북궐도형(北闕圖形)’에 따르면 19세기 말 경복궁 안에는 509동(6806칸)의 전각이 남아 있었다. 지도가 제작될 즈음 이 가운데 113동이 이전 또는 철거됐다. 1916년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할 무렵의 전각 수는 369동. 29년 뒤 광복을 맞은 궁 안에 남겨진 것은 40동(857칸)뿐이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356동의 전각이 사라진 과정을 되짚는다.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3대 조선통감으로 임명한 일제는 대한제국 식민지화의 첫 작업으로 경복궁 전각 4000여 칸을 경매에 부쳤다. 궁내 공원을 새로 짓기 위해서였다. ‘매물’의 30% 이상을 사들인 기타이 아오사부로는 식민지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려고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 총재의 아들이다.

1914년 근정전 동쪽 담장을 허문 일제는 많은 전각을 일본 사찰과 요정에 팔았다. 건춘문 안 비현각은 ‘남산장(南山莊)’, 수정전은 ‘화월별장(花月別莊)’이라는 간판이 달린 채 일본 부호들이 기생을 희롱하며 분탕질을 벌이는 놀이터가 됐다. 1928년 8월 13일 동아일보는 “일본 사람의 절 융흥사(隆興寺)에 팔린 융무당과 윤문당이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 빈터에 주춧돌까지 전부 옮겨져 새로 지어진 다음 불상이 안치됐다”며 “문무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모시는 곳으로 변했다”고 썼다.

건축역사 전문가인 8명의 저자는 경복궁을 비롯해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수난사를 세세히 파헤쳤다. 분단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평양 풍경궁이 사라져간 사연도 덧붙였다. 경희궁의 얼굴이었던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광복 뒤에는 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원래 자리 옆쪽으로 겨우 돌아왔다. 책을 덮고 궁을 거닐면 아직 아물지 않은 건축사의 흉터가 아프게 밟힌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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